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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여인
2018-11-23
잠언 9장 13절“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잠언 8장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의로운 말을 가르치는 여인의 모습으로 지혜를 의인화했다. 지혜의 반대가 어리석음인 것처럼,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도 여인으로 의인화된 어리석음과 정반대의 짝을 이룬다.오늘의 본문이 묘사하는 어리석은 여인의 첫 번째 특징은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다. 조금도 놀랍지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목소리를 가장 높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말을 많이 할수록 귀를 기울어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 적은 법이다. 잠언 10장 8절은 말이 많은 어리석은 자는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잠 13:16). 이것이 잠언 9장에 여인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나는 어리석음의 특징이다. 어리석은 여인은 주장만 강할 뿐, 긍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녀의 말이 가치가 없을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다. “합리적이지 못한 말을 할수록 그녀는 더욱 강압적이고 격한 태도를 드러낸다. 또 무례한 자세로 힘을 써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든다.” 우리가 이 가르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세상에서 인기가 높은 사람들과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혜의 본보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시끄러운 다수가 반드시 옳거나 지혜롭지 않은 이유는 대개 크게 떠들기만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여인의 반대인 어리석은 여인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어리석은 여인이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권위의 자리를 가리킴)에 앉아 지도자인 척 행세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잠 9:14). 많은 사람이 그녀를 따르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일종의 찬탈자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 안에서 그 귀한 특권을 모두 잃고, 어리석음의 노예로 전락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고전 1:30).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은 어리석은 여인을 성적 부도덕과 연결시킨다. 도둑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은 불의한 성적 관계를 상징한다(17절). 금지된 관계는 생명을 약속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파멸과 죽음과 결혼의 파경을 초래한다. 어리석음은 거짓 약속으로 사람들을 스올, 곧 죽음으로 유혹한다. 오직 지혜로운 여인, 바로 하나님이 계시하신 올바른 진리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준다. 코람 데오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과 명예를 훼손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궁금해 할 때가 많다. 사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죄가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따르는 이유는 그것이 제시하는 거짓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여인의 거짓 약속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어리석음을 따르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 거룩한 지혜로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Meet Woman Foll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만사는 다 때가 있다
2018-11-22
전도서 3장 1절“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나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고 말한다 . 별들이 우리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별점에서부터 두 주인공이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고 말하는 멜로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의 모든 것에 운명이라는 개념이 침투해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모두 비인격적인 힘이 만사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인격적인 존재가 만사를 다스리고, 모든 일에 목적을 부여한다는 말은 좀처럼 듣기 어렵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과 변증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비인격적인 실체는 그 어떤 것에도 의미나 목적을 부여할 수 없다. 목적이란 말은 그 자체로 인격적인 특성을 지닌다. 오직 생각할 줄 아는 인격적인 존재만이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 비인격적인 힘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예를 들어, 중력은 자체적으로 의도를 갖고 활동하지 않는다. 중력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주어진 현실일 뿐 , 계획을 세우거나 상황을 이끌어 정해진 목적이나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우리의 눈에 세상만사가 궁극적인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만사를 다스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말은 무의미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전도서 3장과 같은 성경 본문을 대할 때는 전도자가 이스라엘이 믿었던 언약의 하나님, 곧 작정하신 목적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사 46:8-11).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는 말씀은 부분적으로는 탄생, 죽음, 파종, 슬픔, 기쁨과 같은 것이 적절한 때가 있다는 세상사의 이치를 관찰해서 얻어낸 결론이지만, 전도자가 그런 일들의 적절한 때와 적절하지 못한 때를 구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때를 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전 12:13-14).오늘의 본문에 언급된 때와 기한은 인생의 시작(‘태어날 때’)과 끝(‘죽을 때’), 농작물 재배(‘심을 때와 뽑을 때’)를 포함해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된다. 삶은 많은 점에서 반복을 거듭하지만 끝없이 순환하지는 않는다. 삶은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 과정은 인격적인 창조주께서 작정하신 때와 기한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만사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말보다는 ‘만사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이유가 있다’라고 말해야 옳다. 코람 데오 세상만사가 다 때와 목적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사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세계는 비인격적인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온전히 다스리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통제된다. 그분은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엡 1:11).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놀라게 하거나 그분의 계획을 망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안심할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 Time for Everything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다음 세대를 위해
2018-11-21
시편 78편 4절“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우리는 믿음의 조상들로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물려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복음을 확실하게 선포하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호해지고, 언약의 공동체가 교리와 예배의 많은 결함으로 인해 호된 시련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잘 보존해 물려주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소명이 아닐 수 없다. 시편 78편은 이 원리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친다. 본문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언급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이 시편의 저자인 아삽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런 행위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로, 성령의 영감에 의해 역사 속에 나타난 창조주의 사역과 그분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졌다(롬 12:1-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딤후 3:16-17). 아삽이 언약의 백성에 관한 역사를 언급한 이유는 후세대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알게 하고, 그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5-8절). 이 시편을 공부하면 더욱 알게 되겠지만, 아삽은 주로 부정적인 사례를 언급해 교훈을 가르치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패역을 일삼은 광야 세대(9-53절)와 가나안을 정복하고 나서 그곳의 우상들을 제거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실패(54-66절)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 시편은 하나님이 다윗을 일으켜서 자기 백성을 경건하게 살도록 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67-72절). 하나님은 충실한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범사에 그분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존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그 일을 인간들을 도구로 삼아 이루실 생각이셨다. 남은 자들을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작정에 의해 결정된 일이지만, 자기 백성을 믿음으로 인도하고, 남은 자들을 굳세게 하고, 교회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그분의 왕국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계속된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들이 중단 없이 대대로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각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인류의 마지막 한 가정이 남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코람 데오 우리는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의 확실성을 굳게 믿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는 일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그런 보존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인간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충실한 교회의 사역자들, 어머니와 아버지들, 정신적인 조언자들을 통해 진리를 대대로 전하신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For the Coming Generatio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2018-11-20
시편 119편 81절“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편 119편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탱해 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힘든 시련과 환난을 겪는 신자들에게 생명을 준다고 거듭 강조한다. 예를 들어, 시편 저자는 5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고난 중에 자신을 살렸다고 말했다. 또한 54절을 살펴보면, 그가 지극히 거룩하신 창조주의 율례와 계명 가운데서 약속을 발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생명을 주는 능력을 지닌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인내를 포함해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때문이다(딤후 3:16-17). 오늘의 본문도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시편 119편 81절은 구원을 부르짖는 대목이 시작되는 첫 구절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에게 주어지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구원은 시련으로부터의 구원, 곧 시편 저자를 박해하는 사람들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킨다(84-87절). 이런 구원의 갈망은 인내하는 믿음에서 비롯한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끝까지 희망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씀의 씨앗이 굳게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다(마 13:18-23).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구원의 갈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희망을 둔 시편 저자의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시편 저자의 인내는 시련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말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놀랍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83절)라고 말했다. 바싹 말라붙어 검댕이가 묻은 포도주용 가죽 부대는 포도주를 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그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하나님의 확실한 율례를 잊지 않았고, 그분의 계명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지킬 수 있도록 생명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83, 86-88절). 존 칼빈은 이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어떤 고난에 처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써 그분의 도우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시편 저자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고자 하면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다. 항상 성경을 의지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코람 데오 하나님의 약속을 항상 믿으려면 그 약속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약속을 알려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우러날 때는 물론이고, 성경을 펼쳐 들기가 어렵게 느껴질 때조차도 항상 성경을 읽으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신뢰하기를 원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강건하게 하는 믿음을 허락하신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하고 묵상하려고 노력하자.출처: www.ligonier.org 원제: God’s Sustaining Word 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다른 사람들의 칭찬
2018-11-19
잠언 27장 2절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거만한 사람, 곧 항상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최근에 이룬 성공을 떠벌리며, 과거의 승리를 거듭 되뇌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하며 모든 대화를 지배하려 든다. 그는 칭찬에 중독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칭찬한다.우리가 교만한 사람을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겸손의 미덕을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벧전 5: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겸손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게 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칭찬하게 만든다.물론 스스로를 칭찬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모든 형태의 자랑을 일체 금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가르친다(롬 12:3).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을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적절하기만 하다면 스스로 얼마든지 높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교만을 독려하는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기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재능과 성공에 관해 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입사 면접과 같은 경우에는 우리의 능력을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이사야도 하나님이 옛 언약의 공동체를 향해 자신의 진리를 선포할 능력과 의지를 갖춘 사람을 찾으실 때 선뜻 그분 앞에 나섰다(사 6:8).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오직 나만을 이야기의 중심 화제로 삼으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거나 묻지 않거나 상관없이 항상 우리가 이룬 성공을 모두에게 알리려고 애쓸 때에 발생한다.시편 147편 6절은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할 뿐 아니라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다. 나 자신을 칭찬하기에 급급하면, 내가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곧 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런 우상 숭배는 나의 인간 관계에 많은 갈등을 야기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구원을 원한다면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스스로를 높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옳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코람 데오겸손과 온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 성도의 특징이다. 이런 덕성을 연약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겸손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다. 이런 덕성을 지닌 성도들은 스스로의 재능과 약점을 옳게 평가한다. 그들은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의지하고, 모든 염려와 필요를 주님께 맡긴다.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겸손히 낮추는가?출처: www.ligonier.org원제: Praise from Other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쾌락과 가난
2018-11-16
잠언 21장 17절“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성경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그 중에서도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상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특히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잠 1:7).잠언은 우리가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들에 대해 가르침을 베풀기 때문에, 재물과 부에 관한 교훈 역시도 풍부하다. 그 중 검소함과 인내를 권장하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교훈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잠언 13장 11절은 "망령되이 얻는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라고 가르친다. 잠언은 단번에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꾸준히 절약하며 지혜롭게 투자하는 태도를 권장한다. 잠언은 번 돈을 단번에 다 쓰지 않고, 꾸준히 재물을 모으라고 권유한다. 간단히 말해, 잠언은 오늘의 본문에서처럼 쾌락을 자제하라고 가르친다.이 본문은 쾌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리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전한다. 만일 단기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면 일시적인 기쁨을 얻게 될 뿐이다. 금전적인 여유가 생길 때마다 마음껏 쾌락을 누리는 삶을 좋아하면, 항상 돈에 쪼들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미래를 위해 비축해 둘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지혜롭게 투자해 재산을 꾸준히 늘려가는 일이 불가능해진다.‘술과 기름’은 하나님의 복을 상징한다(신 33:24; 시 104:14-15; 사 61:3). 그러나 하나님의 복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그 복을 발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복은 그 자체로써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고 주어지는 선물이다(시 17:15).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전 5:10),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도 쾌락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늘 더 큰 쾌락을 원하다가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나 영적으로 파산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분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안전한 삶을 발견할 수 있다.코람 데오오늘의 문화는 육신의 만족을 자제하지 않을 때 미래에 대가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고 당장의 즐거움을 찾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생각하며 더 큰 행복을 위해 쾌락을 자제하도록 이끄신다. 하나님의 선한 선물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그런 선물 자체만으로는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Pleasure and Povert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경건한 결심
2018-11-15
시편 101편 2-3절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하나님의 나라에서 내 위치를 안전하게 확보할 목적으로 그 분을 힘써 섬기겠다고 다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그 나라의 시민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며 섬기기를 원하는가? 크리스천은 날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우리는 공로를 세움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성향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동기가 선을 쌓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라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거룩한 행위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와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오늘의 본문에는 경건하게 살며 성실하게 나라를 다스리려는 다윗 왕의 결심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찬양한 후, 비로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우리를 대신해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해야만 성화의 기초, 곧 거룩한 성장을 위한 토대가 확립될 수 있다. 죄를 피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건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고, 또 성령을 통해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며,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거룩하게 하려는 계획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빌 2:12-13).오늘의 본문은 경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다짐해야 할 각오를 다룬다. 그러나 이 각오는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적용된다. 한 주석학자가 설명한 대로, 지도자들은 악을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무익한 것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3절), 좁은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요인들을 미워해야 한다(3절). 그들은 죄의 외양만 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뿌리를 근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악을 제거해야 한다(4절). 그들은 은밀한 죄까지 모두 제거하고 온전히 거룩함을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5절), 악이 자신의 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힘써야 한다(6-8절)."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우리 모두 사도의 경고를 가슴에 새기자. 우리의 힘을 의지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렵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기억하면 만족스러운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그것을 잊는다면 곧 넘어지고 말 것이다.코람 데오처음 회심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좋은 경험과 묵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야만 성령의 감화를 통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반드시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심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기억해야만,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죄에 맞서 싸울 힘이 생겨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ly Resolve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기쁨이라는 양약
2018-11-14
잠언 17장 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성경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오늘 본문의 전반부 내용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육체의 건강을 해롭게 한다는 조사 결과나, 즐겁게 사는 사람이 항상 우울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식이다.그런 조사 및 연구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진리, 곧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라는 진리를 사실로 확증한다. 즐겁게 사는 삶은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이 잠언은 경박하게 들뜬 삶을 살라는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다. 혹은 어려운 삶의 상황을 무시한 채 항상 웃으며 살라는 뜻도 아니다. 매튜 헨리는 이 잠언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기쁨으로 섬기면서 외적인 즐거움, 특히 즐거운 대화를 통해 위로를 얻으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석했다. 영혼과 육체를 유익하게 하는 기쁨은 먼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다음으로 그분이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단순한 즐거움을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전도서는 "기쁨으로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같이 피조 세계의 평범한 일들을 통해 기쁨을 누리라고 권고한다(전 9:7). 시편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거듭 강조한다(시 32:11, 53:6).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또 그분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만드신 것들을 기뻐해야 한다(고전 10:31).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즐거운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기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유익하게도 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또한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즐거운 마음의 반대는 ‘뼈를 마르게 하는 심령의 근심’이다. 여기에서 ‘뼈’는 인격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즐거운 마음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크게 유익하게 하지만, 심령의 근심은 심신을 해롭게 만든다. 뼈를 마르게 하는 심령의 근심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는 다르다(시 51:17). 회개는 우리를 회복시켜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만드는 생명의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마음은 냉소적인 특성을 띠기 때문에 단순한 것들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 우리 가운데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이 없기를 기도한다.코람 데오즐거운 마음은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가는 척하지 않는다. 즐거운 마음은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줄 안다(전 7:2). 즐거운 마음은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지속적인 평강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 나아가 그분이 영원하고 참된 기쁨의 근원이라고 확신한다. 즐거운 마음은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짓고 다니지는 않지만,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 4:17)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었다고 확신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Good Medicine of Jo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서로를 날카롭게 하라
2018-11-13
잠언 27장 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서로 정확하게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꿔 말하면 두 명의 친구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과 관계를 맺는 법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을 일을 기꺼이 도와주는 친구도 있고, 매우 친하면서도 당신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유익한 의견을 전혀 건네지 않는 친구도 있다. 만약 당신이 관계의 복을 누리고 있다면 최소한 정직함으로 조언해 줄 친구, 곧 나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을 친구가 한 명은 있을 것이다. 잠언 27장 17절은 그런 친구를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은 서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두 명의 충실한 우정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에 비유했다. 이 비유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 그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후반부를 히브리어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또렷하게 하다"라고 번역한다. 전투를 하는 데 적합하도록 칼날을 철에 갈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충실한 친구는 건설적인 조언을 통해 상대가 성공할 준비를 갖추도록 도와준다. 고대 사회에는 전기숫돌이나 다른 연마 기구가 없었던 탓에 연장을 날카롭게 갈기 위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은 인내심과 주의력이 필요했다. 잠언은 칼을 연마하는 비유를 통하여 친구 관계에서 인내심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명확하게 강조한다. 올바른 때에 건네는 말은 상대방의 발전을 돕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 말이나 한순간의 대화로 상대방을 단번에 뛰어나게 만들 수는 없다. 서로의 발전을 돕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수년 동안 인내를 가지고 우정을 쌓아가며 충실하고 정직하게 다른 의견과 조언을 건네야 한다. 친구가 자신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서 한 번만 노력하고 포기하는 것은 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인격의 성장과 영적 성장은 상호협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태초에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27).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있었고, 나단은 다윗을 회개로 이끈 충실한 친구였다(삼하 12:1-15). 예수님은 한 명의 감독만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 분은 많은 장로와 집사를 세워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게 하셨다(행 6:1-7). 우리 모두는 서로의 발전을 돕고, 더욱 용기를 내어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끌어 줄 친구가 필요하다. 코람 데오 자신을 날카롭게 만들어 줄 다른 철들이 당신의 삶에 함께 하는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바람직한 조언을 할 줄 아는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진정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삶 속에 그런 친구가 없다면, 반드시 찾아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인 조언을 건넬 수 있고, 친구들과 이웃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주님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힘과 도우심을 구하자.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Sharpening One Another 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모든 것이 헛되다
2018-11-12
전도서 1장 1-11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1절)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니"(1:2)라는 유명한 문구로 시작한다. 이 문구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오늘의 본문을 비롯해 전도서 전체의 가르침을 옳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해석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문구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니와, 타락한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가 모두 궁극적으로 헛되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문구는 우리의 삶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준다.전도서 1장 2절의 "헛되다"는 "증기," 또는 "숨결"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벨"을 번역한 것이다. 전도서에서 이 말은 한 줄기의 증기나 숨결과 같이 잠깐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내 힘으로 붙잡기가 어렵다. 따라서 전도서의 "헤벨"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현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이해력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온전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삶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전도서 저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우리의 삶은 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로 채워져 있을까? 그 이유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피조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우리가 항상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삶 속에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측면이 있다는 개념은 오늘의 본문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전도자는 3절에서 인간이 수고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 말은 노동이 무의미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도자가 말하려는 요점은 스스로의 노동으로 지속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노동은 세상의 많은 좋은 것을 누리는 데 필요한 재물을 벌어들이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은 덧없다. "재물은 무덤까지 지고 갈 수 없다"라는 명언은 진리다. 그 누구도 죽을 때 재물을 가져갈 수는 없다. 재물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된다. 물론 그것이 그 자체로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기를, 선한 사람은 그 기업을 "자자손손"에게 물려준다고 하였다(잠 13:22).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 줄 것을 쌓기 위해 그토록 수고롭게 노동하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만 삶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전도서는 "해 아래에서"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해 아래" 있지 않은 삶으로 우리의 생각을 이끈다. 즉,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불어 다른 현실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하도록 이끈다.코람 데오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전도서가 말하는 삶, 곧 "해 아래" 있는 삶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이 세상에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롬 8:28).출처: www.ligonier.org원제: Vanity of Vanitie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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