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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와의 만남: 격려, 부끄러움, 안도감
by 고성제
2023-06-02
기리며: 팀 켈러(1950-2023)늦게 신학을 한 관계로 부교역자 생활도 못해 본 채, 1990년대 초 교회를 개척한 나는 평생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려고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균형의 문제를 고민하는 설교, 변증적 설교, 십자가 복음을 풍성하게 선포하는 설교, 구속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하는 설교, 시사적이고 상담적인 설교 등등. 그저 듣기 좋은 말 다 끌어다 쓴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사실 그 하나하나는 당시 오랫동안 혼자 고민하던 것들의 진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향한다!’고 표방할 수는 있지만 쉽게 거기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처지가 그랬다. 끊임없이 고민은 했지만, 속 시원한 진전은 없었다. 다소 진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통합 정리된 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 굴착이 끝나 터널 저편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터널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굴착공과 같은 심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팀 켈러와의 만남, City To City, 그리고 그 운동을 함께하는 동역자들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때에 이루어졌다. 나는 늘 그 만남을 ‘마치 터널 작업장 저편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한 마스터(대가)와의 만남이었고, 탁월한 멘토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 만남은 내게 격려(위안)와 부끄러움과 안도감이 뒤엉킨 묘한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먼저는 격려였다. 그것은 그동안 고민해온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위안 같은 것이었다. 팀 켈러가 세밀하게 관심을 두고 고민한 부분들이 내가 고민해온 부분들과 상당히 중첩되고 있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틀리지 않았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희열과 위안이 느껴졌다. 회중 가운데 있을 ‘사실상의 불신자들’을 의식한 변증적 설교에 대한 강조, 타 종교나 세속적 신념을 비난이 아닌 존중의 태도로 극복하려는 것, 시대의 문제를 잘 분석하고 극복하려 애쓴다는 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강조, 복음 안에 답이 있음에 대한 확신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내게 부끄러움 또한 느끼게 했다. 그의 가르침은 그동안 나의 고민이 얼마나 폭이 좁고 미숙하며 피상적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름 고민하며 해 온 설교가 얼마나 허술하며, 전체적으로 통합된 탄탄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파편처럼 따로 노는, 조직되지 못한 지식들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갑자기 이런 목사를 의지해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온 성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더 잘 정립된 목회자였더라면 성도들은 얼마나 더 잘 세워지고 복음 안에서 기쁨과 확신에 찬 생활을 하였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그것은 복음을 깊고 넓게 그리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신앙의 여러 주제를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여 뚫어내고, 통합하여 균형 있는 복음적 입장을 정리해 낸 탁월한 마스터를 만났다는 안도감이었다. 지금까지 고민해 오면서도 마땅히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확고한 복음적 논리 위에서 명쾌하게 답을 찾아가도록 도와줄 길잡이를 만난 느낌! 이분이라면 나뿐 아니라 지금 한국 교회 전체가 처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데에 본질적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는 한국 교회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미 급격한 ‘역-엑소더스’(탈교회) 현상을 겪고 있었다. 혹자는 그 현상을 몇몇 대형 교회의 탈선 탓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더 근본적 이유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경험한 것은 ‘우상과 죄의 속박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이 아니라 그저 ‘의무나 관습으로 옭아매는 종교’뿐이었던 것이다. 진리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교회에 왔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스스로 진리를 부정하는 모순된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오히려 교회를 떠나는’ 기막힌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윤리적 노력으로 극복될 일이 아니며, 교회가 복음을 통해 본질적으로 새롭게 될 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팀 켈러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었다.그는 복음을, 그것과 혼동하기 쉬운 것들과 탁월하게 대비해 줌으로써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의 차이를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우선 그는 복음을 각종 의무와 종교적 관습으로 가득한 ‘종교’와 대비시킴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복음 아닌 종교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했다. 또 그는 복음과 복음의 결과(선행 섬김 헌신 등의 윤리적 삶)를 구별함으로써 우리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자주 빠지는 오류로부터 건져주었다. 복음 자체에 대한 올바른 강조가 선행과 헌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선포하는 데 더욱 힘을 써야 하는데, 종종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이 가져오는 결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강조하고 선포해 왔음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강단의 설교가 그러하다 보니 교인들은 풍성한 동기는 알지 못한 채 의무를 강조하는 말만 듣게 되어, 괜히 교회를 다녀서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풍성한 설명 없이 의무만 강조한 것이 한국 교회를 끝없는 죄책감 아래로 몰아가고 성도들을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 점에서 깊은 임팩트를 남겼다.또 그는 복음을 선포하되, 마음의 우상을 분석하여, 거기에다 대고 복음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복음이 효과적으로 선포되도록 도와주었다. 당시까지 우리는 우상을 대개 피상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은연중에 우리 자신은 우상과 무관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상을 예리하고 실제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우리 안에 깔려 있는 불안과 두려움, 인정과 통제의 욕구 등 우상의 역동들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로, 복음을 선포하되, 허공을 치듯 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복음이 우리 안의 무엇을 겨냥해서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며 설교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팀 켈러는 설교자의 선포가 분명하게 초점 잡히게 도와주어서 복음 선포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청중의 내면을 깊이 흔드는 울림이 되게 도와주었다. 또 그는 상황화에 대한 강조를 통해 복음이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와닿는 말씀’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설교자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상황화를 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는 설교자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도한 상황화와 과소한 상황화 사이에서 균형은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설교가 주변 문화와 적절하게 관계하게 함으로써 설교가 더욱 들리는 설교, 와닿는 설교가 되게 했다. 이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그의 확신과 열정, 즉 복음 안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그의 확신과 그 확신에서 비롯된 끝없는 열정이다. 바로 그런 뜨거운 확신 때문에 그는 설교 때마다 그 속에서 무언가에 대해 답을 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회중은 그의 설교를 통해 무언가 적어도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듣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이유로 그의 설교는 모든 회중에게 매력적이고 심지어 불신자에게까지 매력적 전도가 되었다. 설교할 때 그가 그저 전해야 할 내용을 전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고,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불신자와 회의자의 반론과 질문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대해 대답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태도라 여겨진다. 그런 설교는 ‘기독교는 맹목적 신앙을 강요한다’는 일반의 오해를 불식시킴으로써, ‘이유 있는 신앙’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와닿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질문에 대답하는 설교”에 힘쓴다면 우리의 설교 또한 적실성(relevance)을 더욱 갖게 되어 회의적인 세대들에게 더욱 와닿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복음 안에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답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역자는 복음 안에서 그 보물을 찾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좀처럼 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복음 안에 그 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흥분과 기대를 품고서 열정적으로 탐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결국 교회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새로워질 것이며, 이 회의론자의 시대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팀 켈러가 발굴해 낸 보화(대답들)을 배우는 데에 만족하지 말고, 그보다 더, 복음 안에 모든 답이 있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탐구를 계속해 온 그의 치열한 자세를 더욱더 배우면 더욱 좋을 것이라 믿는다.보수신학 계열에 서 있는 나로서 그에게 특별히 감사하는 것은 그가 ‘보수신학이 가지기 쉬운 편협함을 보수신학에 의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논지를 위해 성경 말씀을 일부러 비틀지 않고도 교회가 이 모든 책임 가운데서 균형을 갖추도록 깨워준 것은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다.이렇듯 신선한 도전이 되었던 팀 켈러!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같은 별 위에 있지 않다. 그가 자신이 평소 그처럼 사랑하고 또 위하여 살던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위대한 말들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이 남긴 수많은 책과 글, 설교와 족적을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서 그가 하던 일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살아서 그를 만나 함께할 수 있었던 귀한 특권을 누렸던 우리는 그가 죽어서도 한 알의 밀알처럼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되리라 믿는다.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도시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뉴요커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던 팀 켈러, 그가 천국에서도 그의 소원이 한국을 포함해 지구촌 곳곳의 도시와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목사님, 정말 수고 많았어요. 주안에서 다시 뵐 때까지 편히 쉬세요.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2) : 문화의 상황화
by 고상섭
2023-06-0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남긴 빈자리가 가장 크게 보이는 곳이 있다면 아마 문화의 영역일 것이다. 그의 설교와 강의가 다른 여타 목회자들과 차별성을 보인 지점 또한 문화의 상황화이다. 팀 켈러 전까지 많은 목회자가 복음 자체에 집중했다면, 그는 복음이 전달되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다. 1. 신학적 비전 센터처치에서 팀 켈러는, 많은 사람이 리디머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은 비결을 찾으면서 문학작품과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스타일에 주목하거나 또 어떤 목회 프로그램을 사용하는지에 관심을 보이지만 더 중요한 점은 리디머 교회가 그 방법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에 있다면서, ‘신학적 비전’이라는 말을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이란 교리적 기초와 사역의 현장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으로 “교리적 신조들이 어떻게 현장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당신의 교리를 가지고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다.”[1]신학적 비전은 조직신학이나 신앙고백서에서 해결되지 않는 이슈들이며 현장에 접목되는 실용적인 서적들에서 제기하는 것보다는 더 깊은 주제들이다. 그래서 신학적 비전을 품으려면 먼저 교리적 기초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역의 현장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 기도하고 고민해야 한다. 2. 문화의 상황화 신학적 비전이 교리와 현장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교리와 사역의 현장 즉 문화를 알아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가 부흥하던 시기에 인도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그가 사역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국 교회는 쇠퇴했고 사람들은 교회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뉴비긴은 비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는 새롭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팀 켈러도 문화에 맞추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과 두려움, 열망을 이해하고 긍정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 시대의 문화가 아무리 낯설다 하더라도 깊이 이해하고자 했고, 그 문화에 말을 걸 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용어로 하지 않았다. 문화의 질문을 재구성하고, 관심을 재형성하고, 소망을 재조정했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선교학자들이 말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다.”[2]3. 다양한 문화관상황화를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 안에 다양한 문화관이 존재하는데, 팀 켈러는 그것을 센터처치에서 하나의 도표로 정리해서 설명한다. 문화관을 분석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위의 네 가지 문화관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그중 하나의 문화관을 가지고서는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D. A. 카슨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모델을 연구하고 나서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아우르는 통시적이고 동시적인 지배 모델은 없다”[3]고 말했다. 즉 모든 기독교 모델은 성경적이지만 성경 전체와 세상 전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각 모델은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관에 대한 이해이지 어느 하나의 문화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가 속한 교단이나 신학 배경에 맞는 한 가지 모델을 중심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네 가지 모델의 각각의 장단점을 모두 이해하고 적용할 때 비로소 세상과 올바른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화관이 유일한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라 네 가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1/4의 영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문화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변혁주의 모델한국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가장 많이 취하는 변혁주의 모델(Transformation Model)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이 세계관 모델은 너무 지적인 개념에 치우친 단점이 있고 교회와 공동체가 배제된 채 개인의 비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구호에 매몰되어 승리주의, 자기의, 과도한 확신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한다. 2) 적절성 모델 적절성 모델(Relevance Model)은 일반은총을 극대화하는 공공선을 추구함으로써 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다. 그러나 공공선을 복음의 영역까지 확대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과 영혼구원을 동일선상에 놓기도 한다. 복음이 분명하지 않은 교회들이 많은 상황에서 NGO와 교회의 차별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다.3) 반문화주의 모델반문화주의 모델(Counterculturalist Model)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대조 사회를 목표로 삼기 때문에 교회의 순결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교회 밖의 문화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에 제국과 권력, 자본주의 시장 등은 모두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도로 간주한다. 이런 관점은 정치와 비즈니스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하며, 주변 문화의 영향에 대해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 두 왕국 모델 두 왕국 모델(Two Kingdom Model)은 하나님이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통치자이시지만 두 개의 왕국을 별개의 방식으로 통치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왕국 모델은 하나님은 세상을 일반은총을 따라 통치하시고 교회는 특별은총에 따라 통치하신다고 믿으며, 기독교적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성도로, 교회 밖에서는 건전한 시민으로 사는 삶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은총의 타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단점이 있고, 사회의 선은 모두 자연 계시로 생긴 것으로 간주한다. 또 중립적인 기초 위에 신앙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률, 정부, 예술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단점이 있다. 4. 계절을 알라 위의 그림에서 가운데 있는 원은 각 모델의 중요한 키워드를 말한다. 변혁주의는 세상과 구별된 (탁월한) 세계관을, 적절성 모델은 공공선을, 반문화주의는 대항문화로서의 교회를, 두 왕국이론은 세상을 향한 겸손과 직업 세계를 향한 탁월성을 추구한다. 각각의 키워드가 있지만 원 안에 있는 네 가지 문화관의 키워드를 모두 섞어서 자신의 영역에 맞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말 역간 ‘센터처치’에는 그림 안에 따로 표기가 없지만, 원서에는 “blended Insights”라는 표현이 있다. 각 모델의 장점을 섞어서 활용하라는 것이다. 네 가지 모델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모든 환경에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의 ‘계절’을 잘 살펴보고 그 상황에 맞는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문화적 상황화이며 문화참여(cultural engagement)이다.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교회의 문화참여를 두 개의 ‘아니요’와 하나의 ‘예’로 설명하는데, 켈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전적인 변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이다. 둘째,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이다. 셋째, 문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이다. 볼프가 말하는 변혁과 적응이 아닌 참여라는 말은 문화를 지배하는 것(변혁)과 문화를 버리는 것(적응) 사이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을 말한다. 즉 세상 문화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통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하는 삶이다.”[4]만약 세상이 교회를 적대적으로 대할 때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변혁주의 모델보다는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는 반문화주의 모델이 적절할 것이다. 또 핍박받지만 성장하는 시기에는 변혁주의 모델이 더 어울린다. 교회와 세상의 가치가 비슷한 시기에는 두 왕국 모델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에는 적절성 모델을 통해 공공선에 이바지함으로 문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봄_교회가 핍박받지만 성장하는 시기_변혁주의 모델• 여름_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시기_두 왕국 모델• 가을_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_적절성 모델• 겨울_교회가 세상에 적대적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 약해진 시기_반문화주의 모델어떤 모델이 좋은가를 따지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 교회와 현실은 어느 시대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먼저 세상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문화 모델을 섞어서 활용하면 된다. 단순히 여름은 두 왕국 모델이라고 규정하기보다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문화관 속에서 네 가지 모델의 장점을 모두 섞어서 각 문화에 맞도록 적절히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팀 켈러가 말하는 “blended Insights”이다. 5. 자세와 몸짓 팀 켈러는 문화관을 섞어서 활용하자고 제안하면서 ‘자세와 몸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앤디 크라우치의 컬처 메이킹에 나오는 단어로 ‘자세’(posture)는 네 가지 문화관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모델을 상징하는 단어로, 흔히 말하는 디폴트 값 즉 무의식적 기본위치(unconscious default position)이다. ‘몸짓’(Gesture)은 다른 모델에서부터 나오는 즉흥적인 움직임이다.[5] 각자 자신에게 가장 맞는 문화관의 자세를 가지고서, 상황에 따라 계절에 맞도록 다른 모델의 장점을 취해서 몸짓을 가질 수 있다. 문화에 매우 우호적인 적절성 모델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 반문화주의 모델을 취할 수 있고, 문화에 대해 좀 더 적대적인 모델을 가진 사람들도 상황에 따라 공공선을 추구할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신약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가지는 이중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에베소서 1:1)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에베소라는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과 교회라는 두 영역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느냐가 우리의 문화관을 결정하게 된다.이원론적 삶으로 문화의 모든 것을 거부해서도 안 되고, 문화의 모든 것을 긍정해서도 안 된다. 비판적 향유(critical enjoyment)와 적절한 경계(appropriate wariness)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문화들의 영감과 창작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화 안에 있는 정의와 지혜,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의 표현들을 경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갖고 이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특히 죄와 우상숭배로 인해 왜곡된 것들을 살펴야 한다.[6]6. 대응하지 말고 행동하라다양한 문화관이 있음을 인정하고, 모두 성경의 진리를 반영하는 문화관임을 인정하며 서로 다른 문화관으로 논쟁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문화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세상 속에서 더욱 전도의 문은 닫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오만을 피하라.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많이 된 문화 모델이 모두에게 최고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의 장점과 다른 모델의 약점을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모든 문화관은 각각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진리의 한 단면임을 기억하라. 둘째, 비난하지 말라. 자신에게 과도하게 영향을 끼친 문화의 단점을 알아가면서 그 문화관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될 수도 있다. 또 특정 모델을 맹종하는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상처를 입고서는 그 특정 모델을 비난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에 대해 생각할 때 개인의 경험을 지우고 성경, 문화적 시기, 그리고 당신의 은사를 종합해서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라. 셋째, 좌절하지 말라.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날 때, 그 갈등 때문에 자기 입장의 완고한 지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 순진하게 생각하지 말라. 교회가 모든 모델을 초월해야 한다거나 모든 모델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라. “나는 어떤 모델도 따르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부정적인 어느 하나의 모델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모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가진 모델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겸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관점의 강점을 누리고 약점을 인정하며, 다른 모델들의 강점을 힘써 배워야 한다. 결국, 문화관에서도 복음의 겸손이 필요하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초기에 교회가 도시의 구원자라도 된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회개했다. 이처럼 우리가 도시의 구원자인 양 여기는 것은 해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겸손히 도시와 사람들을 존경하며 배워야 한다. 그들과의 관계는 의도적으로 상호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더 충만히 알기 위해 그들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 복음만이 우리에게 겸손함을 주고(나는 도시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자신감을 주고(나는 도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용기를 준다(나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타인을 축복하는 효과적인 사역이 가능해진다.[7]우리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자칫 리차드 마우가 표현한 것처럼 ‘무례한 기독교’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다양한 문화관을 인식하며 또한 겸손히 배우고 활용하는 신학적 비전이 필요하다. 문화에 대해 분석하고 도전하는 팀 켈러의 설교가 아직도 생생하다. 성경을 이야기하는 설교자는 많지만, 문화를 분석해주는 설교자는 많지 않다. 앞으로 팀 켈러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문화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문화를 향해 평가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포스트 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이 능력이 됨을 확신하고 싶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26 2. 팀 켈러, 설교, 1353. 센터처치, 4834. 같은 책, 493.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이라는 표현은 볼프의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인용. 5. 같은 책, 502 6. 같은 책, 2327. 같은 책, 358
50가지, 팀 켈러가 남긴 말
by Matt Smethurst
2023-05-31
기리며: 팀 켈러(1950-2023)팀 켈러(1950-2023)는 그토록 신실하게 사랑하던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평생 주님에 관해서 쓴 글과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Gospel Coalition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한 켈러는 다작가였다. 더불어 리디머 교회에서 선포된 그의 모든 설교는 무료로 제공된다. 그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콜린 핸슨이 최근에 쓴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Timothy Keller: His Intellectual and Spiritual Formation) 일독을 권한다. 켈러가 내 삶과 사역, 그리고 수많은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측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명언 50가지를 소개한다. 1“죽음이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역할은 단 하나, 그들의 삶을 영원히 더 좋게 만드는 것이다.”2“그리스도인이 가진 확신의 중심 기초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하나님께 두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 마음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가이다.”3“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분의 말씀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가 무슨 말씀을 했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가 진짜 부활했는가 아닌가이다.”4“당신이 거부하는 하나님에 관해서 설명해 보라. 당신이 믿지 않는 하나님에 관해서도 설명해 보라. 당신이 싫어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어쩌면 나도 믿지 않을 거 같다.”5“현대인에게는 성경을 조사하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방향을 반대로 잡아야 한다. 성경이 나를 조사하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실 수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6“사탄은 육체에 상처를 남기는 송곳니로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거짓으로 지배한다. … 사탄의 거짓말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진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7“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죄가 많아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지만, 그러함에도 그분에게 우리는 무척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깊은 겸손과 더불어 큰 자신감을 얻는다.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나라는 존재를 굳이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8“죄의 교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말하는 것만큼 그리스도인이 그리 선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일반 은총의 교리는 세상의 잘못된 세계관이 말하는 것만큼 불신자가 그리 결함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9“당신이 믿는 신이 당신을 화나게 하고 도전할 수 있을 때만, 그 신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행여라도 당신 생각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 신을 믿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예배하는 신은 단지 이상화된 당신 자신에 불과하다.”10“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 … 교회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제자도의 수단은 없다.”11“사랑은 풍덩 빠지는 게 아니다. 사랑은 당신 전부를 올인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할 거야.’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12“‘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건 알아. 하지만 내가 용서가 안 돼.’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는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더 중요한, 나라는 우상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뜻이다.” 13“당신에게 정체성이 일이고 일에서 성공한다면, 그런 정체성은 단지 머리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건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14“그가 나를 사랑하지만, 그가 나를 모른다면, 그건 피상적인 사랑이다. 그가 나를 알기는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그건 악몽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밑바닥까지 아시고 또 우리를 하늘까지 사랑하신다.” 15“곤히 잠든 왕을 깨워서 감히 새벽 세 시에 물 달라고 할 수 있는 건 어린아이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다.”16“관용에 믿음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관용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의 믿음이 취하는 태도이다.”17“전통적 종교는 ‘나는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니까 신은 내게 복을 줘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도록 하셨다. 그러니 이제 나는 그리스도께 감사드리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 종교는 ‘내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라고 한다. 반면에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니 순종하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18“당신이 감히 상상하는 것보다 당신은 훨씬 더 죄가 많고 결함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당신이 감히 꿈꾸던 것보다 당신은 훨씬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이게 바로 복음의 메시지이다.” 19“절벽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약한 가지에 대한 강한 믿음은 강한 가지에 대한 약한 믿음보다 치명적이다. 최종 구원의 여부는 당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군인가에 근거한다.” 20“고통받는 사람들이 당하는 유혹은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알 수 없기에 생긴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21“세상에는 좋은 것, 어려운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영광, 거룩함, 아름다움처럼 최고의 것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최고의 것으로 가는 길은 좋은 것이 아니라 대개는 어려운 일을 통해서라고 한다. … 이것보다 세상이 삶을 이해하는 방식과 더 반대되는 가르침은 없다. 세상이 바라보는 가치에 비추어 이보다 더 전복적인 메시지는 없다.”22“사도들은 기독교 성 윤리를 기독교의 핵심 신념 중 하나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정통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성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실천은 가난한 사람에 향한 관심과 인종 평등 문제만큼이나 복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지가 포함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옳지만 성에 관한 내용은 구식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런 주장은 불가능하다.”23“품질 면에서 매력적이고 가격 면에서 저렴한 혼외 섹스가 얼마든지 소비 상품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약속이 담보되지 않았기에 품질이 떨어지거나 비용이 올라가면 언제라도 떠나면 된다. 하지만 급진적인 자기 헌신과 평생을 바치는 결혼 생활 안에서만 이뤄지는 섹스를 생각해보라. 섹스 시장은 사라질 것이다. 감히 섹스에 값을 매기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24“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궁극의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당신을 위해 죽었다. 궁극의 어둠 속에서도 당신을 버리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지금 당신을 버리시겠는가? 어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당신을 버리실 리가 있겠는가?”25“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대속 교리를 이해할 때만 영적 왜곡을 막을 수 있다. … 오로지 이 교리만이 하나님에 관한 착각을 막는다. 사랑이 있기는 하지만 거룩이 본질인 하나님 또는 어느 정도 거룩함이 있지만 사랑이 본질인 하나님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룩하심과 사랑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두 속성은 상호 의존적이나 동등하다. 오로지 이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볼 때 은혜를 핑계로 버릇없거나, 또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건강하고 제대로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26“세속적 틀은 … 상처 입은 양심의 치유에 아무런 역할을 못 한다. 사랑과 용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자아에게 할 말이 없다. 나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도 돼.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라는 세상의 방식으로는 내 양심을 달래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본 사람에게 세속적 틀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27“진정한 회개는 회칠하기(‘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와 책임 전가(‘사실 내 잘못이 아니었어.’) 그리고 자기 연민(‘당한 걸 생각하면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과 자기 학대(‘나를 욕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 기분 나쁠 거야. 제발 누가 나를 좀 괴롭혀줘.’)가 끝날 때 시작한다.”28“느끼기 전에 먼저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느끼는 경우는 없다. 용서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더 이상 죗값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글쎄, 용서하기 전에 미리 느껴야 할 거 같은데.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하기 전부터 화가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어야 할 거 같은데 말이야.’ 용서하기 전에 용서했다는 감정부터 느끼길 원한다면, 당신은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분노의 감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9“중보기도하는 대상을 향해 계속 화를 품고 있는 건 쉽지 않다. 또한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 상대한테 화를 품거나, 또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왜 그럴까? 기도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30“기도는 진정한 자기 지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이다. 또한 깊은 변화, 곧 사랑의 재배열을 경험하는 주된 방법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선물을 내리신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장 원하는 많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일의 열쇠이다.”31“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거나, 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을, 우리도 안다면 구했을 것을 주신다.” 32“끔찍한 그날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셨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실 하나님을 우리는 안다. …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거절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이제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당연히 받으셨어야 할 바로 그 응답의 대상이 되었다.” 33“자비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책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34“좋은 설교는 인간의 의지를 부수는 몽둥이가 아니라 마음을 찌르는 칼과 같다.”35“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설교의 주요 식단은 강해 설교가 되어야 한다. … 강해 설교야말로 성경 전체가 참되다는 확신을 나타내고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강해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는 특정 주제나 몇몇 동의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부분이 조금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36“설교가 단지 본문을 설명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본문을 사용하여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설교자가 종종 첫 번째 사명, 본문 설명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한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두 번째 사명에는 거의 생각을 쏟지도 못하고 독창성을 부여하지도 못한다.” 37“성경 본문을 주해할 때마다 기억하라. 해당 본문에서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끌어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직 본문 설명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38“최소한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믿지 않는 상태가 어떤지 내가 아주 잘 기억하고 (또는 최소한 이해는 하고) 있음을 불신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39“세속주의의 인간 중심 도덕 가치는 과학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 그것도 나름의 신학적 역사가 있다. 그리고 현대인은 신앙으로만 그 가치를 붙잡고 있다.” 40“십자가 믿음을 통해 우리는 정체성에 필요한 새로운 기초를 확립한다. 이기주의에서 빠져나와 겸손하게 되었고 참으로 확고한 사랑 안에서 든든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기보다는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41“[이것들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비길 데 없는 제안이다: 고통이 제거할 수 없는 의미,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만족, 상처를 주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을 강화하는 자유, 자신을 압도하거나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 정체성, 스스로를 압제자로 만들지 않는 도덕적 나침반, 그리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소망.” 42“십자가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43“예수님은 위대한 세계 종교를 세우거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수 세기 동안 인간의 생각과 삶의 진로를 정하거나 한 역사상 극소수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극소수의 그룹에 속한다. 반면에 역사 속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신성한 존재라고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주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 중 다수가 선동가였고 때로는 참된 기독교 신자들 일부를 끌고 나온 작고 독립적인 분파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독특한 점은 그가 극소수에 불과한 첫 번째 집단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두 번째 집단의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44“히브리 세계관은 하나에서 열까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모든 생각에 반대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발음하거나 철자로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삶과 주장, 부활을 통해 가장 가까운 유대인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지자일 뿐 아니라 우리를 찾으러 오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까지 확신시켰다.”45“그리스도께 나올 때, 당신은 모든 조건을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하면, 당신께 복종하겠다’라고 말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하면, 당신께 순종하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전혀 순종이 아니다. 실제로 당신의 말은 이런 의미이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 아니라 조언자이다. 귀하의 조언을 기꺼이 받겠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자기 결정권을 포기해야 한다. 자기 부인은 자기 주장으로 정의되는 후기 현대 문화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부름받았다. 자기 부인 외에는 답이 없다.” 46“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교리이다.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 교리이다.” 47“죽음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안전이 아니라면, 네게 안전이란 없다. 왜냐하면 너에게서 빼앗길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 영원한 팔로 너를 안아주겠다. 다른 모든 무기는 너를 실망에 빠트리지만, 나는 결코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냄새나는 소금은 매우 불쾌하지만, 동시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마음을 평안히 가지라. 믿음으로 우리가 그를 구주로 모신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맛보게 될 것이다.” 48“자기 행동을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죄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죄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위해 더 열심이시고 선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데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불신한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에게 나의 통제권을 전부 맡긴다면 비참해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결코 ‘오늘 악해져야지. 그래서 우리 인생뿐 아니라 인류 모두의 인생을 망쳐버려야지’라고 결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바란 것은 행복이었다. ‘우리는 단지 행복하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행복을 찾아야겠어. 하나님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49“진정으로 당신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폭풍, 곧 죄와 악에 대한 신성한 공의와 심판의 폭풍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기꺼이 그 궁극의 폭풍 속에서 고개를 숙이셨다. 그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고 죽으셨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에 대한 답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증명한다. 당신을 위해 그는 폭풍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그렇기에 지금 당신을 둘러싼 폭풍 가운데에서도 그분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 50“당신이 지금보다 백배 더 나쁘다고 해도 그의 자비 앞에서는 차마 죄인이라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 원제: 50 Quotes from Tim Keller(1950-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 그를 통하여 변화된 나와 우리 교회
by 길성운
2023-05-30
기리며: 팀 켈러(1950-2023)좋은 작품은 화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 가치가 급등하듯이, 귀한 분들의 소천은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널리 알려지며, 그들이 남긴 업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팀 켈러의 소천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다가온다. 나에게도 팀 켈러의 소천 소식은 처음에는 충격이었지만, 이제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더욱 깊이 다가온다.성복중앙교회는 70년대 성령 운동으로 유명했던 이천석 목사께서 설립하였다. 그분의 소천 이후 교회는 크고 작은 내홍을 여러 번 앓았다. 그러는 사이 교회는 약해졌고, 이웃들에게 좋지 못한 소문으로 외면당했다. 2009년 12월, 나는 성복중앙교회 5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나의 임무는 상처를 치유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시 부흥을 꿈꾸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7년간 분투하였다. 성경을 가르치며 제자훈련에 진력하였다. 성도들이 돌아오고 새가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이미지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확신이 없었다. 2014년, 현 복음과도시 이사장인 이인호 목사의 제안으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면서, 팀 켈러를 만났고, 그의 목회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나와 내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목회자로서 다시 가슴이 뛰게 되었고, 목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회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픔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열렸다.내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복음의 재발견’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많은 교회는 지금 부흥의 시기가 끝난 이후에 율법화, 종교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런 교회들은 전통을 진리로 믿고 자신들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 결국 고사하게 될 위기 앞에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화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다. 종교는 순종하면 용서받는다고 한다. 바리새인들은 행동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자를 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용납되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비난당할 때, 종교적인 사람은 격노하거나 무너진다. 좋은 평판 받는 자아상은 나에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나의 정체성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사랑이기에 다르게 반응한다. 종교는 나의 행위와 윤리를 강조하나 복음은 그리스도가 베푸신 은혜와 그 은혜에 기반한 동기를 강조한다. 이런 복음적 시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나는 복음의 재발견을 통하여 자주 질문하게 되었다. 나의 목회적 동기는 무엇인가? 나의 정체성은 누구로 인하여 세워지는가? 내가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우리 교회는 55년이 된 교회이다. 그러다 보니 나름의 전통이 있었다. 과거의 일들을 답습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는 토요일에 본당 청소를 한다. 본당 1층은 여전도회가, 2층은 남전도회가 한다. 그런데 계단에 떨어진 휴지는 아무도 줍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성도들에게 질문을 한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교회는 복음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 교회는 계단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교회가 되었다. 팀 켈러 덕분이다.둘째로 설교와 예배의 변화이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진수를 몸소 보여주었다. 나의 설교는 언제나 도덕주의적으로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등이었다. 그런데 팀켈러는 “이런 성경적 진리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용납해주셨고, 지금도 힘을 주시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이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사역의 결과들을 알려주는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어느 해부터인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의 설교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항상 복음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과 살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 판단이 난무하던 교회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셋째로 도시문화에 대한 복음적 침투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현대 사회는 점점 도시화되고 있으며, 도시는 개인화 계층화를 심화시킨다. 이런 도시 문화에 적절히 반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앞에는 고려대학교가 있다. 수년 전부터 베리타스 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고대 기독 교수들과 선교단체 간사들이 연합하여 저명한 학자들을 모시고, 신자와 비신자를 초대하여 토론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리이다. 일종의 신개념 전도집회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진리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므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첫해 오스 기니스가 주강사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제임스 스미스, 존 레녹스, 알리스터 맥그라스, 이어령 교수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역교회 목회자로서 맛보기 힘든 은혜를 맛보고 있다.넷째로 이웃 교회들과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확신을 심어주었다. 팀 켈러는 우리가 속한 도시가 복음화되려면 하나의 대형교회보다는 100개의 소형교회가 연합할 때 훨씬 효과적이라고 강조하였다. 단순한 연합을 넘어서 거룩한 목적을 위한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였다.이런 도전은 내가 속한 종암동에 있는 22개 교회를 아름답게 보게 하였고, 성북구에 있는 400여 교회와 어떻게 연합을 이룰 것인지 고민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연합회와 함께 지역 아파트 단지 경비원과 미화원을 위로하고, 코로나 시기에 고생하는 보건소 공무원들에게 선물과 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작은 교회들의 영상 설비 지원하는 일 등을 하게 되었다. 함께 웃고, 함께 웃는 동네가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목사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앞의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그의 인격 때문이었다. 그의 삶의 향기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 성육신적 모습이 떠오른다. 2016년 안식월에 리디머 교회 주일 예배를 참석하였다. 리디머 교회는 당시 뉴욕 맨해튼에 3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 웨스트에 있는 예배당은 1층 2층 예배방이었다. 그곳은 빈자리 없이 가득 메워져 있었고, 연령층은 매우 젊었으며, 강대상 없이 메모 한 장만으로 그는 청중과 소통하였다. 예배 후 입구에서 팀 켈러 목사님은 평범한 동양인 목사를 친근하게 반겨주었고, 함께 사진을 찍고, 읽고 있었던 그의 저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는 평범한 옆집 아저씨처럼 교인들과 인사하였고, 아내와 함께 이동하였다. 그는 매우 자연스러웠고, 평범한 인간이었다.2018년 내한하여 횃불회관에서 목회자 콘퍼런스를 하고 있을 때 한 기자가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 남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였고, 좋은 이웃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본인이 좋은 아빠 혹은 좋은 이웃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다. 뉴욕에서 개척하여 6천 명이 이상이 출석하는 초대형교회 담임목사였고, 복음적 분립개척자 양성소인 CTC와 복음연합 TGC의 설립자 겸 대표였다. 그는 미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인간이었고, 우리들의 친구였다.내 동료는 팀 켈러 추모 댓글에 “내가 그동안 만나본 분 중에 가장 예수님을 닮은 분이므로, 천국에 가면 가장 먼저 팀 켈러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보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 그의 겸손한 모습이 그분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든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1) : 복음의 재발견
by 고상섭
2023-05-29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TGC 회장 샌디 웰슨은 추모글에서 지난 100년 동안 팀 켈러처럼 영향을 준 목회자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삶을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을 몇 가지 정리해보는 것으로 팀 켈러를 기억해보고자 한다. 팀 켈러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한결같이 팀 켈러의 여러 설교와 저서를 통해 “복음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팀 켈러의 목회와 삶을 한 문장으로 평가한다면 아마도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The Gospel Changes Everything)라는 문장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1. 매로우 논쟁 팀 켈러가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복음이다. 그 복음을 오늘의 현실에 맞도록 상황화한 것인데, 팀 켈러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17세기 매로우 논쟁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그 당시의 대두되었던 ‘은혜의 복음’이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팀 켈러는 매로우 논쟁의 의미를 다룬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를 추천하는 글에서 당시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신앙의 정수(Marrow of Mordern Divinity)를 읽고 동의했던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율법폐기주의자로 오해받고 또 그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로 오해받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양쪽 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동일하게 믿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로 나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단순히 교리를 믿는 것 이상의 문제다. 매로우 논쟁 당시 양측은 모두 행위로 구원받는다거나, 구원받은 뒤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둘 다 대놓고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회와 설교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둘 다 마음의 태도, 행동, 인격, 성경을 읽는 방식이 종합된 결과물이다.[1]팀 켈러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전통적인 교리를 믿지만 목회의 방식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복음을 분명히 알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오해하면 엉뚱한 해법을 내놓게 된다고 우려한다. 율법주의에 대한 해답으로 율법과 순종을 덜 강조하게 되고, 반율법주의에 대한 해답으로 율법과 순종을 더 강조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복음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뿌리를 발견하여 실체를 드러내어야 한다. 팀 켈러는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매로우 논쟁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게 복음을 믿고 있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매로우 논쟁에 대한 팀 켈러의 입장을 알려면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신앙의 정수를 추천한다.) 2. 칭의와 성화의 분리 팀 켈러는 복음이 쉽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간파하고서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는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을 떠나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로 복음이 변질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제3의 방식인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복음을 다시 재정의하면서 “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는 말로 복음을 소개한다.[2]“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은 복음은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무엇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복음 안에는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대신해 주신 것을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는 말을 통해 행위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율법주의적 요소를 배제한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 이 말은 은혜와 은혜의 결과인 선행은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곧, 이 말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설명한다. 칭의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구원을 말하고, 성화란 구원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성경적 복음은 칭의의 은혜가 성화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고 오해될 때 생겨난다. 율법주의자는 칭의를 얻었으니 이제 나의 힘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율법주의로 변질되고, 반율법주의자는 칭의의 구원은 감사하지만 성화의 과정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버리고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이 모두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오해이다. 은혜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선행과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게 된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한 어머니 자궁 안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다”라고 정의했다.[3]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그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이 분리될 때 사람들은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로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신뢰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 안에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제3의 길로 복음을 전하라 팀 켈러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아닌 제3의 길로 복음을 전하라 권유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과 방탕한 선지자이다. 두 책의 원제는 ‘The Prodigal God’, ‘The Prodigal Prophet’으로 ‘낭비하다’라는 단어 ‘prodigal’을 사용하고 있다. 팀 켈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흔히 말하는 ‘탕자’가 아니라 그 본문에서는 사랑이 헤픈,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탕부’ 즉 하나님 아버지를 조명하고, 그 끝없는 사랑은 ‘방탕한 선지자’인 요나를 진정한 선지자로 변화시키는 끝없는 사랑임을 재조명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허비하는 둘째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반율법주의자를 대변한다. 또 아버지의 집에서 있지만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율법주의자를 대변한다.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 앞에서 첫째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팀 켈러는 첫째 아들이 전형적인 율법주의자로서 자신의 행위로 아버지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라 말하면서 “아버지와 그의 관계를 가로막은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저주받을 그들의 선행이다”라고 율법주의를 비판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로 비교해서 설명한 팀 켈러는 방탕한 선지자를 통해서 그 모습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타도 도망가는 요나는 전형적인 둘째 아들 즉 반율법주의의 모습이다. 또 순종하긴 하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분노하는 요나는 첫째 아들 전형적인 율법주의자의 모습이다. 팀 켈러는 오늘날 행복을 추구하는 두 가지 모습을 자아 발견과 도덕적 순응의 길로 설명한다. 첫째 아들은 도덕적 순응의 길로 행복을 추구하고, 둘째 아들은 자아 발견의 길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분석하면서,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 즉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 그리스도 중심적 복음 팀 켈러의 복음의 핵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있다. 복음이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주신 일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랑에 대한 오해가 양극단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바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팀 켈러는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 모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며, 그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한 형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형은 동생을 용서하지 못했고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한 동생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지 못했지만, 진정한 형이신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또한 자신이 죽음으로써 잃어버린 아들인 우리에게 진정한 하늘의 유산을 남겨주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순종의 동기가 될 때 비로소 복음이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방탕한 선지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분노하는 방탕한 선지자인 요나를 대신해서 진정한 요나이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요나는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빠져서 목숨을 건졌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요나가 되셔서 고통의 폭풍 속으로 친히 목숨을 버리셨다. 방탕한 선지자 요나를 향해 끝없는 사랑의 추격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품고 변화시키신다. 팀 켈러는 인생의 폭풍이 올 때 그 폭풍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폭풍 속으로 뛰어드심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닥쳐야 할 모든 독과 저주와 심판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인생의 폭풍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폭풍 속에 있는 모든 저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 더 이상 폭풍은 심판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폭풍 속에서 빠져 죽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아도 고난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의문 속에서도 그분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 폭풍 속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폭풍 한복판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4]팀 켈러의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에서 “인생의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닥친 폭풍 속에서 당신을 건져주실 것입니다”라고 설교한다면 그 설교가 유대교 랍비의 설교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율법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고 또한 기도해도 폭풍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반율법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팀 켈러는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선포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오해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즐겁게 순종할 수 있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연결한다. 팀 켈러의 유산인 복음의 재발견은 오늘날 복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많은 목회자와 성도에게 참된 복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등불이 되었다. 그가 남긴 복음의 유산을 이제는 더욱 풍성하게 전달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남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양극단을 오가던 우리에게 팀 켈러는 복음을 통해 참된 은혜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의 고백처럼 정말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주1.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13.2. 팀 켈러, 센터처치, 52.3. 센터처치, 109.4. 팀 켈러, 방탕한 선지자, 190.
팀켈러
팀 켈러, 조용히 다가와 내 삶을 바꾼 사람
by 이규현
2023-05-26
기리며: 팀 켈러(1950-2023)2004년 안산동산교회는 하나의 큰 나무가 되기보다 큰 숲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로 하면서 교회 분립개척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결정의 결과로 내가 개척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내 어깨에는 두 가지 큰 짐이 지워져 있었다. 하나는 개척된 우리 교회가 아름답게 뿌리를 내려서 또 하나의 나무로 든든히 서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짐은 우리 교회가 좋은 모델이 되어서 안산동산교회의 ‘큰숲운동’이 아름답게 이어져 나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한국 교회의 분립 운동은 모 교회에서 사역하던 부목사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간 개척 헌금을 해주는 대신에 모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서 개척하게 했다. 물론 그것도 개척하는 목회자에게는 매우 고마운 것이고 모 교회 입장에서도 정말 힘든 결정을 한 것이었다. 안산동산교회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교회개척 운동을 펼쳤는데, 재정 지원과 함께 사람을 파송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 교회가 개척될 때 100여 명의 성도들이 동참했고, 이것이 교회가 빨리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안산동산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인중 목사님과 함께 10여 명의 담임목사님들이 모여서 매주 셀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에서 분립개척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거기서 더 많은 교회가 분립개척 운동에 동참하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실제로 몇몇 교회들이 분립개척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고민이 생겼는데 어떻게 하면 분립한 모든 교회가 건강하게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미국의 리디머 교회에서 시티투시티(CITY TO CITY)라는 이름으로 교회분립 개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것을 배우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결과로 팀 켈러 목사님의 제자들이 한국에 와서 CTC의 개척 운동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깨달았던 소중한 교훈이 재정 지원과 개척 멤버 파송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척할 목회자를 평가하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고민이 확 뚫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CTC코리아가 생기게 되었고, 그때부터 팀 켈러 목사님의 여러 책을 읽게 되면서 그분의 사역 방향을 같이 배우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리디머 교회를 방문해서 팀 켈러의 설교를 한 번 들은 경험과 그분이 한국에 왔을 때 설교를 듣고 가까이에서 같이 식사한 정도의 친분밖에 없지만, 그분의 수많은 저서와 여러 훈련 매뉴얼을 통하여 소중한 가르침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내 설교와 목회의 방향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국 CTC에서 오신 목사님들의 강의를 처음 들을 때 교회개척의 노하우를 듣고 싶었는데, 뜻밖에도 이분들은 계속해서 복음에 대해서 강의했다. 솔직히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우리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은 단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자격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서 ‘왜, 무엇을, 어떻게’를 결정짓는 전부임을 알게 되었다. 복음을 설교하지만 목회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고 있고, 복음을 공부하지만 세상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그런 복음 말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모든 방식,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복음임을 알게 되었다.특별히 교회가 도시 속에서 어떻게 복음적으로 사역할지 많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 우리끼리 교회에 갇혀서 게토화되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도시를 이해하고 도시를 사랑하고 도시의 필요를 채워가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적용하게 되었다.또 팀 켈러를 통해서 우상의 실체를 깊이 안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 자신도 분명히 복음적 사역을 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정말 눈치챌 수 없는 우상이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박수가 어느새 내 안에 우상으로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을 온전히 다스리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우상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특별히 팀 켈러를 통해서 배운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성경의 본문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큰 흐름을 보게 하는 눈을 열어주었다. 결국 모든 설교는 청중에게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들어야 하는 설교가 되었고, 그것이 내 삶을 새롭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부교역자들과의 관계, 목회 방침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했다. 특히 더 큰 교회를 목표로 끝없이 달려가는 목회가 아니라, 자신의 살을 찢으면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마음으로 가장 귀한 동역자들을 새로운 교회로 파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더 큰 교회를 부러워하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고 작은 교회와 비교하면서 거들먹거릴 수도 없는 복음적 교회를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게 했다.처음에 소중한 사람들을 파송하고 나면 그 빈자리가 참으로 크게 다가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빈 자리에는 그동안 소극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이 최선을 다해 섬김으로써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파송 받아 간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 우리 교회에서 겨우 주일 출석만 하던 분들이 그곳에서는 앞장서서 섬기는 일꾼이 되어 있었다. 결국 교회개척은 파송된 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파송한 우리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팀 켈러가 말한 대로 가장 확실한 전도 방법은 교회개척이고 가장 확실한 교회 갱신도 교회개척임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다.이제 팀 켈러가 남긴 여러 가르침이 교과서에 들어 있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 목회와 삶에서 살아서 펄떡거리게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길 기도한다.
복음으로 나의 목회 시야를 밝힌 팀 켈러
by 이인호
2023-05-25
기리며: 팀 켈러(1950-2023)하나님은 왜 이 시대에 꼭 있어야 할 분을 일찍 데려가시는 걸까? 팀 켈러가 주님 곁으로 갔다는 소식은 내게 깊은 슬픔과 더불어 또 한 번 이런 질문을 남겼다. 칼빈은 55세에, 루터는 63세에, 하용조 목사님은 65세에, 옥한흠 목사님 72세에 주님 품으로 가셨다.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 그렇게 하심으로 그들을 우리 가슴속에 남겨두시려는 것은 아닐까? 그분들이 더 오래 사는 것보다,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때에 그들을 데려가심으로써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을 우리가 가슴에 새기고, 그렇게 우리도 그들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팀 켈러 목사님에게 깊은 빚을 진 나는 그분에게 받은 은혜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11년 전, 교회 건축을 마친 어느 날이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는데, 마음속에 자유와 기쁨의 크기는 줄어들었다. 늘 긴장하고 좌우를 경계하며 살얼음판 걷듯 목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왜 그랬을까? 개척부터 제자훈련과 중보기도, 강해설교에 집중하는 목회를 통해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은 은혜롭고 성숙한 평신도 동역자들이 배출되고, 그들의 헌신을 통해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헌신의 이면에는 공로 의식, 판단, 외식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대로 또 다른 10년이 흐르고 나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율법적, 전통적, 제도적 교회를 답습하게 되는 건 자명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그저 연수가 오래되면 모든 교회가 겪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려니 달래도 보고 근심하고 탄식하던 그때, 팀 켈러를 알게 되었다.당시 ‘큰숲 모임’이라는 목회자 주간 모임에서 본격적으로 팀 켈러를 공부하던 중 미국 CTC의 강사들을 초청하여 매년 두세 차례 집중 세미나를 치렀고, 그때 책을 통해서만 알던 그의 목회와 철학을 그의 제자들을 통해 보다 가까이 배우는 축복을 누렸다. 이후 CTC코리아가 설립되었다. 초대 이사장이 되어 팀 켈러를 초청할 기회를 얻었고 가까이서 그를 보고 배울 축복을 누렸다. 그는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분이었다. 그 후 미국에서 팀 켈러, 존 파이퍼 등이 설립한 TGC(복음연합운동)를 한국에 설립하는 일에 참여하며 팀 켈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서 시대를 통찰하는 메시지와 복음적 교회의 연합운동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복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는 그의 확신을 배우는 기회였다. 이후 CTC코리아와 TGC코리아가 연합하여 사단법인 복음과도시를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의 복음적 연합을 꿈꾸며 개척운동과 갱신운동을 통해 특별히 다음세대가 복음 안에서 준비되도록 돕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걸음들을 얼마나 축복하고 계시는지 모른다. 이렇게 팀 켈러를 만나고 그와 길을 따라가며 사역한 지 11년이 흘렀다. 팀 켈러, 나 자신을 보게 하였다그를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켰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던 교회의 모습은 나의 내면의 투영이고, 내 설교와 목회의 반영이었다. 복음의 깨달음과 감동으로 개척에 뛰어들고 복음의 열정으로 달려왔지만, 정작 내 삶과 행동은 복음으로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도들은 내 말보다 모습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복음과 종교 사이를 널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설교 속에 복음과 율법이 뒤섞여 있었다. 율법은 우리를 거룩의 길로 인도할 수 없고 단지 죄를 깨닫게 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 초등교사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설교를 통해 그들을 그리스도보다 그들 자신의 각오와 결단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감동적인 간증과 예화, 때로는 과감하게 나의 실패를 나누는 솔직함으로 쉼 없이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애썼다. 은혜의 힘을 믿기보다 도전과 결단의 힘을 더 믿었다. 압박을 통해 마음과 생각, 행동과 윤리의식을 바꾸려 했다. 은혜의 복음으로 완전히 연소되지 못한 나의 설교, 나의 인격, 나의 목회가 점점 교회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도 교회를 건축하고, 대형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 나라가 오는 줄 알았다. 한국 교회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는 줄 모르고, 오직 내가 목회하는 우리 교회만 성장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팀 켈러는 이런 나의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시각인지 알려주었다.감사하게도 팀 켈러는 나의 고민을 마치 그가 먼저 고민한 것처럼, 건강한 신학적 깊이와 체계적인 가르침으로 자상하게 깨달음을 주었다. 무엇보다 ‘어떻게 복음으로 삶과 교회를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나의 뿌옇던 목회 시야를 환하게 열어 주었다.팀 켈러, 나와 교회를 행복하게 바꾸었다 그는 나 자신을 바꾸고 내 설교를 바꾸고, 그래서 우리 교회를 더 행복하게 바꾸어주었다. 먼저, 내 설교가 바뀌었다. 결단에 초점을 두었던 설교가 이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설교가 되었다. 어느 날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전에는 당신 설교를 들으면 각성과 결단을 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은혜를 사모하게 돼요.” 내 설교가 정말 변하고 있었다.어느 성도의 간증은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매주 설교를 통해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무거움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라면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변화시킨 복음을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전해야겠다는 이전에 없던 강한 열망이 마음 가운데 생겼습니다.”매주 설교를 통해서 구원받음과 삶의 변화를 경험한 생생한 간증들이 풍성해졌다. 교회에 첫발을 들이고 예수님을 만난 감격의 간증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복음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심령에 변화를 경험한 간증들이 많아졌다.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란 어느 집사님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던 예수님과 복음 안에서 만난 예수님이 너무 다르다고 눈물로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성령님이 살아 일하시는 교회를 통해 복음의 은혜가 제 삶에 흐르니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녀와의 관계, 시부모님과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이 제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다른 훈련생들도 최근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입을 모아 같은 고백을 하는 모습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도들을 변화시키려고 소리치며 온갖 감동적인 예화로 울리고 웃길 때는 나타나지 않던 변화가, 복음을 설교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자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교가 변하면서 교회가 복음 안에서 세워져 가기 시작했다. 복음이, 한번 공부하고 이수하면 끝인 무엇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기초요 삶의 원리로 교회 안에서 자리 잡았다.둘째,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마디로, 자유와 사랑이다. 교회 안에 이전보다 더 부드럽고 은혜로우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무엇보다 성도들은 목사인 나에게 부드러워졌다고 말한다. 그들을 변화시키려 했던 이전과는 달리,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먼저 변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를 용납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니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평신도 지도자들, 특별히 장로들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졌다. 당회도, 교역자 모임도 복음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은혜는 우리 안에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섬김을 가져왔다. 봉사의 동기가 바뀐 것이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으로 섬기니 기쁨이 넘쳤다. 또한 복음은 우리가 점점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사모할 수 있게 하였다. 팀 켈러는 ‘칭의’의 은혜를 끊임없이 인식할 때 거룩한 삶(성화)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다가갈수록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주인 삼은 우리 자신의 우상을 보게 된다. 성도들이 죄 이면의 죄인 우상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죄의 문제를 더 근본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할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해 복음을 더 의지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알게 되니, 공동체 안에 서로의 죄, 우상을 고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었다.세 번째, 지역 사회와 소통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다. 10년 정도 지나면서 우리는 어느덧 악한 세상과 담을 쌓고 우리끼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수도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우리에게 팀 켈러는 도시는 우리가 멀리해야 할 죄악의 도성이 아니라 구속받아야 할 곳임을 알게 하였다. 하나님은 도시로 사람들을 모으고 계시며, 이 도시가 영향력의 중심부이고 문화의 중심부임을 알게 되었다. 바울이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한 것처럼, 교회가 도시와 문화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도시 안에 복음적 생태계를 이루어 도시를 구속하여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도시 안에서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팀 켈러는 가장 세속적이고 세계에서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뉴욕’에서 목회를 해왔다. 그들과 교감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그는 매주 뉴요커들을 만나고, 그들을 이해하며, 설교에도 생각의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단어와 문장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한 단어를 사용했다. 그의 모습은 나의 설교와 우리 교회의 관심사를 변화시켰다. 아직 부족하지만, 비신자들이 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설교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도시와 소통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며 지역사회와 하나가 되는 모습이 많아진다. 보수적이던 성도들이 이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는 자연스러운 문화가 형성되었다.팀 켈러, 내 시야를 넓혀 주었다 우리 교회만 잘 성장하면 지상명령은 이루어지는 줄 알고 달려왔다. 그런 내게 팀 켈러는 교회 개척이 지상명령 성취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며, 목회자 양성은 신학교가 아닌 지역교회의 몫임을 알려주었다. 성도들과 함께 분립개척의 비전을 품게 되었다. 장로들과 함께 우리 교회가 홀로 거목이 되기보다 앞으로 수십, 수백 교회를 분립개척하는 교회가 되기로 했다. 이러한 방향을 정하고 지난 10년 동안 네 교회를 분립개척하였고, 내년에는 다섯 번째 분립을 진행할 예정이다. 내가 은퇴할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교회를 분립개척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교회의 DNA가 되어 계속되길 소망한다.팀 켈러는 우리로 도시 안에 복음적 생태계의 수립을 꿈꾸게 해주었다. 크고 작은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성장하고 함께 사역하며, 도시가 우리를 통해서 유익을 얻길 소망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품은 많은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함께 복음을 위해서 연합하게 된 것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전해준 축복이다. 초대형교회의 목회자들과 중소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교제하며 꿈꾸고 있다. 이런 연합이 어디에 또 있을까! 이것이 복음이 이루어내는 기적이다. 그분들과 연합하여 분립개척의 기회가 없는 목사님들이 개척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재정을 후원하는 사역을 펼쳐가고 있다. 한국 교회의 갱신과 연합을 위해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일하고 계심을 날마다 경험한다. 글을 맺으며나의 삶에 두 가지 큰 만남이 있다면, 첫째는 고 옥한흠 목사님이다. 그분을 통해 건강한 제자훈련 목회를 배웠다. 그 가르침대로 했더니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래서 늘 고맙고 감사한 분이다. 둘째는 팀 켈러 목사님이다. 그분은 고 옥한흠 목사님처럼 그 죽음이 내게 깊은 슬픔과 눈물을 남긴 또 한 분이다. 그분은 복음과 종교 사이를 널뛰던 내게 복음적 목회의 확신을 전해주었다. 내 교회만 생각하던 내게 분립개척을 생각하고 하였고, 한국 교회 생태계회복을 꿈꾸게 하였다. 내가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목회하게 해주었고, 우리 교회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팀 켈러, 예수님을 닮으신 귀한 분, 한국에 다시 한번 꼭 오고 싶다고 하셨던 그분은 이렇게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가슴속으로 찾아오셨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영적 거인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 귀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돈 카슨: 팀 켈러를 떠나보내며
by Don Carson
2023-05-24
기리며: 팀 켈러(1950-2023)거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를 떠나보낸 지금 그로부터 배운 몇 가지를 숙고하려고 한다. 조만간 신중하고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소천 기사가 나오겠지만, 이 글은 그런 종류가 아니다. 나의 겸손한 목표는 그에 관한 몇 가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아벨처럼 “죽었지만 여전히 말하도록”(히 11:4) 하려는 것이다. 켈러와 나는 직접 대면하기 전에 저술 프로젝트부터 먼저 공동으로 진행했다.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Worship by the Book)라는 제목 아래, 교파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강해 사역에 깊이 헌신한 목회자들이 회중 예배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요를 각자 한 장씩 맡아 길게 써내는 프로젝트였다. 켈러는 우리를 대표하는 장로교인이었다. 2002년 책이 나올 무렵, 나는 마침내 켈러를 만났다. 첫 미팅은 우리 두 사람이 다 연사로 초청된 런던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였고, 그다음은 뉴욕에서였다. 후자의 경우, 나는 다른 일로 프린스턴에 있었는데, 켈러가 고속 열차를 타고 뉴욕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우리는 노천 카페에서 만나 점심을 즐겼다. 살다 보면 가끔 만나자마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 켈러가 내게는 그런 친구였다. 우리의 대화는 막힘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 서로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신학, 교회의 현실, 고백적 복음주의의 강점과 실패, 더 많은 강해 설교에 대한 긴급한 필요성, 미국과 다른 지역의 현재 문화 및 기타 경향에 대한 분석, 특정 성경 구절의 의미, 영적 훈련 등등….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가족에 대한 부분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윔블던, PGA 투어, 월드 시리즈, 스탠리 컵, 또는 그런 것들과 비슷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켈리와 아내 캐시는 뉴욕 시절 내내 아파트에서 살았기에 그의 대화에 정원과 새소리, 꽃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스펄전과는 확실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에게는 뒷마당 있는 집에 사는 남편이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아주 자주 우리는 전도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약 12년 전, 우리는 서로의 전도 여행을 나누기 위해서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방금 돌아왔고, 나는 호주 멜버른에서 막 귀국한 시점이었다. 나와 비교해서 켈러가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야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복음 전도에서 어떻게 더 열매를 맺을 것인가라는 주제에 관한 전망은 그가 확실히 나보다 뛰어났다. 복음 전도는 우리를 지난 사반세기 뉴욕시에서 목격한 그의 놀라운 사역의 열매로 이끈다. 많은 설교자가 대형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모든 대형 교회를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극히 소수의 교회만이 성경 문맹으로 가득 찬 고도로 세속적이고 도시적인 환경에서, 그것도 오로지 초신자의 회심을 통해서 대형 교회를 이뤄냈다. 켈러의 설교는 형태와 디자인이라는 특징에서 볼 때 강해였다. 그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성경 본문의 설명이다. 그가 텍스트의 단위로 보는 건 반절(half-verse)이나 난해한 표현이 아니라 한 단락 또는 장 전체였다. 그는 오래된 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 능력의 일부가 텍스트 적용에 쏟은 그의 노력의 결과로 달성되었다. 그가 다룬 주제가 단지 개인의 죄와 필요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설교에서 대규모의 도덕적이고 문화적 경향에 관한 통찰을 빼지 않았다. 구약의 선지자처럼 그는 주저함 없이 문화와 국가라는 문제를 거론했고, 단지 회개만이 아니라 정의를 촉구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질투했다. 그는 또한 성경 신학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궤적이야말로 사려 깊은 독자들을 거듭거듭 복음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성경을 읽는 방법을 알게 하였다. 뉴욕 회중 대부분이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설교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건 그가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회중을 상대로 거의 12년 동안 설교한 결과였다.그의 독서량은 대단했다. 사회 분석과 시사 문제에 관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역사 신학, 주석, 그리고 광범위한 문헌을 탐독하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을 쏟았다. 일정 기간, 그는 매일 훈련의 과정으로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읽었다. (그가 기독교강요를 처음 읽은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또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C. S. 루이스를 얼마나 철저하게 소화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건 루이스의 신학을 흉내 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루이스의 이미지와 언어 사용 능력, 매력적인 변증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향한 헌신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졌다. 켈러 추종자 중 일부는 이 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의 문화적 분석에는 매료되었는지 몰라도, 그의 설교가 얼마나 깊은 수준에서 역사적 신앙고백주의(historic confessionalism)에 묶여 있는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설교는 항상 겸손한 경건 속에서 이뤄졌다. 그의 설교가 머리에서 멈추는 법은 결코 없었다. 그는 논쟁이 고백, 기도,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깊은 감각을 대체하도록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삶과 사역에 있어서 그가 암과 투병하던 마지막 몇 년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점이 더 통렬하고 예리하게 발휘되었다. 켈러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그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여겼던 사도 요한처럼, 담임목사님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켈러 교회의 교인이 적지 않다. 이것은 제대로 된 양육을 받는 교회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다. 동시에 차분함(cool)을 잃지 않는 목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켈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냉정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평가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냉정을 “잃은” 모습도 본 적이 없다. 더 넓게 보면, 그의 변증 설교가 특히 더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보다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상대의 주장을 요약하는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다. 점수를 따고 싶은 초보자의 유혹은 때때로 상대방을 이기는 자신의 능력 자체를 파괴하곤 한다. 그러나 켈러는 그런 유혹이 주는 함정에 단 한 번도 걸려서 넘어진 적이 없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일한 자기 수양과 기독교적 예의는 숱한 논쟁 속에서 변함없이 드러났다. 궁극적으로 The Gospel Coalition이 된 최초 협의회가 구성된 건 2005년이었다. 켈러는 TVM(Theological Vision of Ministry)이라고 부르는 문서의 초안 작성을 요청받았다. 최초 협의회는 약 마흔 명의 목회자로 구성되었고, 대부분은 TVM에 어떤 변화가 담겨야 하는지에 관해서 확고한 의견을 가진 고집 센 사람들이었다. 누구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작업물이 이런저런 도전을 받을 때, 짜증 내는 방어적 태도로 후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켈러에게서 그런 기미를 본 적이 없다. 협의회원 중 한 형제가 켈러가 초안을 짠 TVM에 대해서 무려 쉰 개가 넘는 개선안을 들고 왔다. 켈러와 그 형제는 그것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켈러는 그가 제안한 변경 사항이 개선 사항임을 유쾌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제기한 비판적인 의견에 감사했다. 켈러의 태도는 그 형제의 제안이 TVM의 취지를 약화시킨다고 느끼는 부분을 만났을 경우에 더 큰 힘을 발했다. 켈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애초 취지를 밀어붙였고, 그러면서도 반대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태도는 TVM(및 기타 문서)의 보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향후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의 특징이 되었다. 우리는 많은 일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서 배웠다. 협의회 구성원은 모두가 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고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TGC 위원회 회의가 올해 가장 좋아하는 회의라고 켈러는 여러 번 말하곤 했다. 그게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켈러가 보여준 상호 작용의 모범사례가 회의 참가자의 관계의 질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관계에는 좋은 유머 감각도 도움이 된다. 두 번째 협의회 회의(2006년)에서 내 옆에 앉아 있던 켈러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던 노트북 화면을 내게로 돌렸다. 어떤 신학적 요점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켈러가 다른 참가자를 놀라게 한 어떤 말을 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켈러의 말을 요약해서 비서 중 한 명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비서는 그 내용을 즉시 온라인에 올렸다. “놀라지 마세요! 팀 켈러가 방금 이러저러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그 내용을 발견한 켈러의 비서가 여전히 내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상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목사님, 정말로 이렇게 말했습니까?” 켈러가 말한 내용이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 데에는 채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찮은 사람이라면 신뢰를 저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런 일에 기분이 상했을 법도 한데, 켈러는 오히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웃어넘겼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약속을 강화했다. “협의회 회의 중에 나온 내용은 협의회장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그 후 몇 년 동안 이 간단한 규칙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참가자 모두와 공유한 켈러의 웃음소리는 우리가 그 순간을 잘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켈러가 농담을 위한 농담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캐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캐시를 향한 켈러의 배려를 언급하지 않고 나의 회고를 끝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켈러는 설교에서 지나가는 말로라도 아내를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건 그와 나눈 사적인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켈러에게 캐시가 이렇게 생각하더라, 캐시가 은혜와 사역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식의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는 농담으로라도 켈러가 그녀에 대해 무시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그렇다,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켈러는 아내를 사랑했고 소중히 여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십 년 함께하면서 그들은 서로 더 가까워졌고, 켈러가 병마가 주는 고통의 마지막 시기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사랑은 절정에 달했다. 병에 걸리고 켈러와 캐시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서로를 더 사랑한 적은 없었다. 이건 켈러가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거인 한 사람을 잃었다. 원제: Don Carson Pays Tribute to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by Ray Ortlund
2023-05-20
기리며: 팀 켈러(1950-2023)“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몬 7). 슬프게도 이 구절 속 칭찬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팀 켈러는 다르다. 그에게만은 이 칭찬이 적합하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개인적인 감사와 더불어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이다. 팀 켈러는 내가 가장 신뢰한, 우리 세대에서 매우 두드러진 그리스도의 목소리였다. 그가 말하거나 글을 쓸 때, 행여라도 나중에 켈러로 인해서 창피를 당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진실을 외쳤다. 그가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께 진실했다. 1980년대에 나는 켈러의 사역을 처음 접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였던 그는 PCA 교회 개척자를 위한 여름 훈련 행사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The Gospel Coalition으로서의 그의 지도력이 점차 형성되고 정의되었고, 그 결과 TGC는 다양한 양심적 그리스도인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긍정적인 집결 지점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책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명확성이 필요한 바로 그 포인트를 중심으로, 그는 복음의 의미를 더욱 강조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리디머 장로교회의 목사로서 그의 설교는 ‘설득력 있는 신실함’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켈러의 사역에서 세 가지 측면이 눈에 띈다. 1. 충만한 복음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만드는 중심축이 되는 “충만한 복음”은 성경적 복음에 대한 원칙적인 감수성을 의미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위치를 완전히 바꾸도록 하는 복음에 대한 경외심이다. 그리고 그 전환은 모든 수준의 인간관계에서 매일 만나는 다양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충만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과 더 일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이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더 드러나게 된다. 충만한 복음은 교회도 새롭게 한다. 복음을 축소하던 교회가 복음이 삶 속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도록 힘을 쏟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Center Church에서 “복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라는 제목 아래 켈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복음은 단지 ABC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삶의 A부터 Z까지이다. 비그리스도인을 구원하는 건 복음이고,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경적 원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성숙해진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을 더욱 깊이 믿어 이성과 마음,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이 변화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켈러가 약 이십 년 전에 내 사역을 바꾼 방법이다. 지난 시간 많은 영적 선배가 나를 도왔다. 내 아버지 J. I. 패커, 존 스토트, 프랜시스 쉐퍼 등등. 그러나 켈러가 전하는 복음을 전체적인 관점으로 듣기 시작했을 때,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단편적인 생각은 기꺼이 그가 제시하는 더 큰 비전에 자리를 양보했다. 십자가, 은혜, 대속, 전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와 같은 친숙한 주제들, 마침내 이 모든 진리와 다른 것들이 하나의 초점, 즉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우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으로 수렴되었다. 그렇다. 켈러는 박식했고 또 명료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나은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나는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2000년 7월, 자동차 여행 중이었다. 당시 나는 조지아 오거스타에 있는 제일장로교회 목사였다. 나는 여름휴가가 끝나고 모든 교인이 돌아왔을 때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려는 계획이었다. 아내와 내가 휴가를 떠나기 전, 교인 중 한 사람이 리디머 교회에서 한 켈러의 설교 카세트테이프로 가득한 신발 상자를 건넸다. 자,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지아에서 아이오와까지 차를 몰고 왕복하는 시간 내내 우리 부부는 켈러의 설교를 들었고, 또 토론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쉬지 않고 반복하는 강조점, 복음 자체의 포괄적 관련성이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복음의 관련성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내게 꼭 필요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비로소 나의 복음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 오거스타로 돌아가던 중에 들었던 로마서 강해는 나 개인뿐 아니라 사실상 우리 교회의 전환점이 되었다.나는 이 세대에 얼마나 많은 다른 목회자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2. 진정한 부흥처음에 나는 부흥이 켈러의 사역에서 갖는 중요성을 접하고 매우 놀랐다. 일반적으로 진지한 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자신을 부흥 및 각성이라는 주제와 그다지 연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켈러는 그런 전형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일관성이 있었다. 복음은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 이상일 뿐 아니라, 위로부터 쏟아지는 새로움(refreshment)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예: 행 3:20). 따라서 진정한 부흥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관심사가 되어야만 한다. 켈러는 그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그의 신학교 스승인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켈러에게 영적 갱신의 민감성과 관련해서 영향을 미쳤다. 켈러는 부흥에 대비하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목회자를 위한 입문서, 러브레이스의 고전인 ‘Dynamics of Spiritual Life’를 존중했다. 켈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나는 고든콘웰(Gordon-Conwell Seminary)에서 러브레이스의 여러 강의를 수강했다. 그중에는 1972년 가을에 첫 강의를 시작하고 나중에 책으로 나온 “Dynamics of Spiritual Life” 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과목과 함께 나는 부흥의 역사를 다루는 “Evangelical Awakenings” 코스도 수강했다. 이 과정은 내 생각과 사역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이라는 표현도 사실 매우 절제된 것이다. 내 사역을 알고 또 러브레이스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켈러가 사역에 관한 모든 아이디어를 얻은 곳이 바로 여기였구나!”켈러는 한 개인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능력에서 인간 존재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의 완전한 능력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복음에 관한 일관된 사고방식이야말로 부흥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3. 선교적 지혜켈러는 미움이 만연한 우리 시대에 공평하고 공손한 공개 증언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외인에 대하여는 지혜로 행하는”(골 4:5)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도와 제자도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능했다. 어쩌면 그가 가진 합리성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여기 내슈빌에서 나는 그의 훌륭한 연설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의 연설은 나중에 “Post-Everything”이라는 글로 발전했다. 그날 켈러는 오늘날 비전통적인 사람들을 교회에 오게 하려고 기독교가 가진 대담한 신학적 확신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사명은 “모든 것이 지난 시대에(Post-Everythings)”를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부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복음 속 풍성함을 우리부터 제대로 인식함으로 믿음을 더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켈러는 믿지 않는 이들이 가진 우려 사항과 함께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신학이 그들을 향해 얼마나 놀라운 관련성을 가지고 선포될 수 있는지를 조목조목 나열했다.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이 중시하는 경험적 성향은 복음이 진리일 뿐 아니라, 실제적인 체험, 즉 하나님 그분을 경험하게 하는 것임을 증명하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더 주목하게 만든다. 또한 세상의 잘난 체하는 도덕주의에 대한 혐오감은 분명하고도 도전적으로 복음과 독선을 분리한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더욱이, 사회 정의에 대한 우리 세대의 강렬한 열망은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헤르만 리델보스와 다른 개혁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관련해서는 총체적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주장하는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옹호자가 있다. 따라서 이런 선배를 발판 삼아 누구라도 삶과 문화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요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신학 자체가 오늘날 뜨거운 이슈에 대해서 얼마든지 설득력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신학을 꼭꼭 누르며 숨 막히게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가 좀 더 겸손하고 현명한 태도를 가진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신학 속에는 선교적 지혜가 담겨있고, 그 지혜가 우리를 기다린다. 켈러가 가르쳐준 게 바로 그 부분이다. 나는 켈러만큼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정도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이제 우리가 잃어버린 이 세대의 첫 기독교 거물이 되었다. 이것은 냉정한 사실이다.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헌신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나는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팀 켈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그렇기에 내가 삶을 마칠 때 나의 인생 전체를 요약하는 진술이 그리스도께 조금은 더 진실해질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팀 켈러,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원제: Ray Ortlund: I Thank God for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를 기리며, 한국에서
by 복음과도시
2023-05-20
기리며: 팀 켈러(1950-2023)고 옥한흠 목사님처럼 그 죽음이 내게 깊은 슬픔과 눈물을 남긴 또 한 분.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지 가까이서 가르쳐주신 분. 예수님을 닮으신 귀한 분. 복음과 종교 사이를 널뛰던 내게 복음적 목회의 확신을 전해주신 고마운 분. 내 교회만 생각하던 내게 분립개척을 생각하고 연합을 생각하게 해주신 분, 같은 뜻을 품은 좋은 동역자들을 한국과 미국에서 만나게 해주신 분, 내가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목회하게 해주신 분…. 그래서 우리 교회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신 목사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_이인호 목사, 더사랑의교회 팀 켈러 목사님께서 결국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네요. 너무 아쉽지만, 많은 제자를 세우셨으니 복음 사역은 변함없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켈러 목사님이 안 계시다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_온기섭 목사, 의왕우리교회주님, 왜 이리도 이 땅에 필요한 분을 급히 데려가시나요? 목사님, 고맙습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위선적 삶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삶이 진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이 삭막한 도시에서 사랑과 연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옥한흠, 하용조 목사님을 보내던 때가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 한동안 아프겠지만 더 사랑하라고 팀 목사님을 보내신 주님을 더 바라보라는 사인으로 알고 남은 과업을 이어 나가야 할 것 같네요.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_길성운 목사, 성복중앙교회 팀 켈러 목사님을 통하여 받은 많은 영감에 감사합니다. 그분이 저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은 CTCK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동역하고, 개척하고, 교회를 세우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팀 켈러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겸손하게 이 사역을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좌충우돌하던 개척목회 현장에서, 좌로 우로 치우치며, 고슴도치처럼 양들을 찌르며, 속으로 끙끙대며, 율법주의와 상대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을 때마다 책과 영상, 그에게 영향받은 사역자를 통해 팀 켈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만나 감사한 것은 그가 전하고 살아낸 것이 ‘복음을 믿음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걸어온 팀 켈러 목사님께 감사합니다. 믿음의 선배인 그를 따라 겸손하게 우리 구주 예수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땡큐, 땡큐. 땡큐!! _박용주 목사, 나주혁신장로교회 우리 다수에게 어떤 분기점이 되신, 너무나 고마우신 분이 우리보다 조금 먼저 가셨네요. 잘 기리고, 이 나라에서 이 나라답게 아름다운 복음의 사람들이 잘 계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축복하면서, 팀의 길을 잘 바라보겠습니다. 안타까우면서도 복음과도시의 건강한 젊은 동역자님들 생각에 소망이…. _정갑신 목사, 예수향남교회 불과 5년 전에 한국에서 건강한 팀 켈러 목사님을 복음과도시 초기 멤버들과 같이 처음 만났습니다. 그 직후 제가 먼저 암 수술을 받고 건강을 잃었다가 지금은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입성은 팀 켈러가 먼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서가 어떨지 모르지만,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역하면서 그 나라 입성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_박은조 목사, 은혜샘물교회 떨리는 마음으로 팀 켈러 목사님이 묵으시는 방에 들어가 다음날 있을 장충체육관 집회 설교를 위해 대화를 나누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설명해주시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잡혀 녹음해온 대화를 몇 번씩 듣다가 그 깊은 뜻을 깨닫고 혼자서 감탄을 연발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설교가 끝나시고 강단 아래에서 오늘 저녁 너와 내가 하나였다고 격려해주시던 그 따뜻한 눈빛과 미소가 앞으로도 더욱 그리울 것 같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께서 이끌어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 다 갚을 수 없겠지만, 복음적인 교회 개척을 통해 건강한 교회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일에 미력하나마 힘을 다하리라 다짐해봅니다. _곽수광 목사, 푸른나무교회오늘 돌아가셨군요. 72세로 보내드리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안타까운 믿음의 선배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런 분을 오래 살도록 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에 유익할 듯한데,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은 우리 생각-방식과 다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유한한 인생에게 당장 사느냐 죽느냐, 또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전혀 이슈가 아니고, 주께서 의도를 가지고 부여하신 삶을 어떻게 살다 가느냐가 중요함을 절감합니다. 여러분, 모두 잘 살고 잘 죽읍시다! _정민영 선교사, (전) 국제위클리프 부총재 같은 시대에 살아가며 잠시라도 뵐 수 있었던 게 큰 특권입니다. 제 가슴에는 “성경 속에 답이 있음을 확신했던 선배” “그 답들을 찾는데 끝까지 헌신했던 분” “복음을 추상적 개념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쓰신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님의 평강 안에 안식하시길…. _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팀 켈러 목사님, 나의 스승이시며 목회와 신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모델이셨던 분! 남기신 글처럼, 이쪽 천국에서 저쪽 더 좋고 영원한 천국으로 가셨군요. 다시 만날 것을 알지만 헤어짐은 언제나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 유학 보낼 때도, 아들 군대 보낼 때도, 남편 주재원으로 보낼 때도…. 더 좋은 모습으로 곧 만날 것을 알지만 그래도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듯이, 팀 목사님을 보내는 이날에 자꾸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1991년 9월 처음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도시 사역(Urban Ministry)을 강의하시던 모습, 그때 나이 40대 초반의 팀 목사님이 뉴욕에서 개척한 리디머 교회를 소개하며 강의하셨는데, 아침 8시 30분 강의였음에도 강의실 옆이고 뒤고 많은 청강생이 서서 강의를 듣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Goodbye는 없습니다. See you soon만 있을 뿐…. 벌써 그분의 예수님 향기가 그립습니다. _박노철 목사, 더사랑교회한국에서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제는 천국에서 뵈어야겠네요. 그러나 팀 켈러 소천 이후에 더 큰 영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C. S. 루이스. 존 스토트에 이어 켈러 목사님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복음의 정의가 무엇인지, 그 능력과 넓이와 깊이가 무엇인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우리 한반도에도 계속해서 그런 영적 거장들이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또한 한반도를 향한 켈러 목사님의 소원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_최성은 목사, 지구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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