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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이라는 고민스러운 문제
by John Piper
2018-11-22
구원의 확신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고민스러운 문제다. 여기서 고민하게 되는 점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객관적 사실들의 진실 여부가 아니다(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는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는지,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하시는지 등). 이 객관적 사실들은 우리의 신앙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문제에 있어 우리를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은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주관적 확신이다.구원의 확신이 있는가?이는 ‘내가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압축된다. 이 문제가 우리를 고뇌하게 만드는 이유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자신은 구원받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따라서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진정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은 진짜인가?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물론, 그들은 선의로 그럴 수 있다). 즉, 구원받는 믿음이란 어떤 진리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결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잘못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변화를 통하여 믿음의 참됨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데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특정한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이 갖고 있는 최소한의 믿음에 대해서조차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같은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진리를 잃게 한다. 또한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때때로 구원의 확신을 줄 것이다.새로운 빛, 새로운 안식우리는 기적적이고 심오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의 속성을 축소시키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와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라는 객관적 보증과, 바로 그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주관적 보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객관적 보증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히 10:14)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적 보증은 ‘성화되는 과정’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다.다음으로 우리는 구원받는 믿음의 두가지 정의를 깨달아야 한다. 첫째로, 믿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또는 아름다움)을 보는 '영적인 시각'이다. 즉,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의 역사를 듣거나 읽게 될 때, 이 복음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 자체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기 이전에도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에게는 이런 일이 있다. 나는 이 깨달음을 고린도후서 4장 4 절에서 얻었다. 바울은 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했다. 믿음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빛’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다.믿음은 이 영광의 복음 안에서 ‘보장된 안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장된 안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보장되지 않은 안식‘을 가진 사람들(구원받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보기 위해 그 분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영원한 벌에서 구원받기 위해 믿음을 선택할 뿐,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장된 안식을 받을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보는’ 자들에게는 안식이 보장된다.빛이 비추는 곳우리는 복음의 빛이 드러나는 십자가와 또한 그분의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엡 1:18). 더 나아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풍성히 임하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Agonizing Problem of the Assurance of Salvation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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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세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by Russell Moore
2018-11-21
딱 세 단어만 사용해서 비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몇 주 전에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 이런 질문을 올렸다. 그때 나는 "세 단어로 복음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어.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 66권이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에 더 큰 도전이 되어, 그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세 단어로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세 단어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 세 단어는 바로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1. 주(Lord)‘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은 통치하는 왕이시며 사랑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곧 창조주로서 그분이 가진 주권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일에 대한 의미를 포함한다. 만물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요 1:1-5; 골 1:16).또한 이 단어는 우리 생명의 절대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단절시키면서, 다른 주인들이나 황제들, 가령 파라오나 가이사와 같은 우상들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거나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이 처하게 된 곤경도 지적하는 의미를 가진다.2. 예수(Jesus)다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이렇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누가 말씀하시는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다윗 혈통, 아브라함의 자손인 요셉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구원자를 보내시는 사건과 또한 그 이면에 있는 언약의 역사를 전달하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지금 이 사람으로 집약되고, 이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씨이며 다윗의 자손임을 전달한다.‘예수’라는 단어는 ‘구원’과 ‘죄’의 정의를 필요로 한다.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둘이 함께 만나는 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롬 1-3장). 이는 우리 죄에서 기인한 저주와 예수님이 어떻게 대속과 희생을 통해 그 저주를 받으셨는지에 대한 설명을 함축한다.또한 ‘예수’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백성’이라는 구절을 정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온 우주를 통치하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중에 거하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고, 하늘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보혈과 기도와 생명으로써 중보하실 수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반복해서 약속하신 그 언약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수님 안에서 ‘예’와 ‘아멘’으로 나타난다(고후 1:20).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의 상속자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 약속들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된다(갈 3:29).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3).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 2:19)이다.성령에 의해 머리와 몸으로 연합된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예수’라는 단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3. 그리스도(Christ)마지막 단어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last name)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의 칭호다. 무엇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의 성령이다. 누구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 아버지다. 무엇을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왕권이다. 예수님은 아담과 다윗을 통해 예표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소유하신 언약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현실이 되며, 더불어 미래에 완성될 소망으로 다가온다. 이 왕권은 죽음과 지옥에서 해방된 온 가문의 장자로서(롬 8:29),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입증된다.‘그리스도’라는 단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구원을 되돌아보았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되돌아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창조된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공동 상속자로서 미래를 바라본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 주시고(엡 1:10-11), 우주적 사명의 완성을 그의 아버지께 넘겨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도록 역사하신다(고전 15:28).우리는 사방에서 타락으로 파괴된 모습을 보며 신음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성령으로 빚어지고,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교회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써 현존하는 그분의 세계로 기쁘게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며, 오실 왕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로서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간다.물론 할 말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66권이 필요하다. 또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많은 말씀이 필요하며,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신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이 세 가지 단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You Explain the Gospel in 3 Words?번역: 고갑균
복음
변증
주
예수
그리스도
성경66권
하나님의음성
공동상속자
신성
절대근원
구약과 신약의 그리스도
by Burk Parsons
2018-11-20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대의 금언을 들은 적이 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난다.” 이때 ‘감추어지다’라는 단어와 ‘드러나다’라는 단어가 신구약의 관계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진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즉 신약은 구약에서 씨앗으로 심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활짝 꽃피운다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신약은 단순하게도 ‘새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신약’이라고 불린다. 신약은 단지 과거의 계시에 대한 주석이 아닌 새로운 계시이다. 신약은 단순히 초대교회 사도들의 구약에 대한 묵상을 기록해 놓은 전집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제의 시간과 공간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와 그분의 약속된 나라, 그리고 새 언약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죄악 된 인간들을 감독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계속되는 계시는 구약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사건은 아니었다.하나님은 과거에 행하셨고, 현재 행하고 계시며, 미래에 행하실 모든 일이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신약의 여러 지면을 통해 주권적으로 상기시키신다. 다시 말해, ‘말씀대로’라는 신약의 언급은 결코 가볍게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계시의 진실성과 창조부터 영화까지 이어지는 구속사라는 파노라마를 보게 된다. 또 우리는 그 가운데 나타나는 신구약의 아름다운 조화를 바라볼 수 있다. 창조부터 영화까지의 모든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따른 것이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향하던 길에서 두 제자에게 모든 성경에서 자신과 관계된 일들을 해석해 주실 때 직접 제시하셨던 내용을 하나님은 율법서, 선지서, 성문서라는 구약의 세 부분에 걸쳐 웅장하게 제시하신다.그러나 이 사실은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이야기에 숨어 계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위해 건전한 주해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구약의 모든 페이지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전체 구약이 그리스도를 가리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통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가 성경의 모든 배경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계심을 알고 구약과 신약을 읽어 나가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Christ of the Old and New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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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Robinson
2018-11-20
일부 교인들에게 ‘예정’이라는 단어는 변덕스럽고 나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 임의대로 인류 중 얼마는 구원하시고, (일찍 생을 마감한 영유아까지 포함하여) 죄인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크리스천 중에는 예정을 저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이런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목사가 예정에 대해 언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목사는 쫓겨나거나 주먹다짐 혹은 그 이상의 심한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각에 예정하시는 하나님은 반(反)민주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정을 청교도적인 종교의 산물이요, 16세기의 광적인 목사가 만들어 낸 교리적인 창작물로 여긴다. 그 후손들이 예정 교리에 근거해서 신학적인 ‘주의’(ism)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이와 반대의 생각을 가진 교회들은 예정을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성경 교리를 일깨워 주는 소중한 단어로 생각한다. 예정은 이 세상의 분자나 원자 혹은 그보다 더 작은 미세한 개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통제 속에 존재한다는 위로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주는 말이다. 그리고 예정이 주는 위로와 확신은 구원의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성경적인 교리미국 종교 역사에서 몇 가지 교리들은 다양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예정 교리는 가장 분명하고 변증할 필요가 없는 교리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1장 5절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기 때문이다. 또 에베소서 1장 11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었다”라고 말씀한다. 이 에베소서의 말씀은 로마서 9장과 요한복음 6장의 많은 부분들과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와 함께, 나를 자원하여 신학에 헌신하게 만든 말씀이다. 여기에 사도행전 13장 48절은 나를 완전히 그 앞에 엎드리게 했던 말씀이다.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또 그와 비슷한 교리인 ‘선택’은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미움 받는 교리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해석가들은 예정 교리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그러나 많은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이 예정 교리를 방치해 둔다. 또 이를 통해 신학적인 열매를 거두려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매우 문제가 많고 위험한 교리로 여기기도 한다. 그들은 예정 교리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 예정론은 그저 신학교 수업의 한 토론 주제일 뿐, 삶의 전반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러나 예정론을 만들어 낸 사람으로 다들 잘못 인식하는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존 칼빈은 앞서 언급한 복음 전도자들이나 목사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을 한다.“이 위대한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단순히 까다롭고 격한 논쟁만 일으키는 주제가 아니다.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피곤하게만 하는 추상적인 주제도 아니다. 오히려 경건한 자들의 섬김에 유익을 주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예정 교리는 우리를 온전한 믿음에 이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한다. 예정 교리는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예정론에 관한 주제를 지금까지 가장 심도 있게 다룬 책을 쓴 로레인 뵈트너(Lorraine Boettner)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예정 교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차갑고, 쓸모없고,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상한 교리들을 부자연스럽게 엮은 체계도 아니다. 오히려 예정론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 살아 있는, 가장 생명력 있고 중요한 설명이다. 예정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갖게 하고, 삶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도록 적용될 수 있는, 차원 높지만 실용적인 진리의 체계이다.”아름다운 교리예정은 아름다운 교리이다. 예정의 아름다움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정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칼빈과 뵈트너가 지적한 것처럼, 예정은 크리스천의 삶에 중요하고도 실용적으로 적용되는 교리이다. 예정은 단순히 호기심을 가진 신학생들을 위한 토론이나 논쟁을 위한 주제가 아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첫째,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세심하게 인류 역사를 써 나가신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은 없다. 전능하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영원 전에 계획되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둘째,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라는 말씀이 실제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그로 인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롬 5:8).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자신의 생명을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내어주셨다(벧전 3:18).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다.셋째,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죄인 된 우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자들을 선택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신다(롬 10:14-15).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바로 그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는 놀라운 특권을 허락하신다.넷째, 하나님의 영광은 무궁하지만 인간의 영광은 무궁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지으셨다(사 42:8). 그러므로 인생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과 관련되어 행해진다.또한 예정 교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고, 죽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엡 2:1). 그러므로 우리가 예정을 무시해서 살면, 영적 영양 실조에 걸리게 된다.실용적인 교리사람들에게 자주 왜곡되어 온 예정 교리는 우리의 영적 진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강화해 준다.첫째, 예정은 우리를 선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고 완전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가 장차 받을 하늘의 기업은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장차 받을 기업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기업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없다. 또한 우리에게서 그 기업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도 없다(롬 8:31-39). 분명 수많은 위험과 수고와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들은 끝까지 보존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예정을 통해 배우는 진리는 매일 고난과 아픔의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 진리로 인해 매일의 영적 전투를 치루느라 연약해진 성도들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확실히 지키실 것이다(요 10:28).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의 신앙을 세워가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듣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우리가 예정에 대해 들을 때,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확증하신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선택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영원하고 불변하며 선한 의지 때문임을 우리가 보고 알게 하신다. 무엇도 이 예정을 철회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폭풍우도, 사탄의 공격도, 어떠한 변화나 육신의 결함이나 연약조차도, 하나님의 선택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안에서 그 원인을 찾을 때만 안전하다.둘째, 예정은 우리의 구원이 주권적이고 선하신 하나님께 영원한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슬픔과 핍박과 실패가 우연이 아님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고난의 사냥개는 하나님이 그들을 자유케 하실 때까지 재갈을 물고 있다.”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결코 늦게 오시지 않는다. 결코 다른 주소로 가시지도 않는다. 당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통은 당신을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한 그분의 끊임없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늘 함께하시는 절대적인 주권은 인간의 근심을 위한 가장 좋은 처방이다.셋째, 예정 교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두렵게 하거나, 논쟁을 불러 일으켜 시간을 허비하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고 감사하게 한다. 왜 하나님이 나를 가족으로 선택하셨을까? 왜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적어도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이웃은 믿지 않을까? 왜 나는 교회를 중요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왜 나는 매주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을까?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분은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 1:5). 내가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 나를 겸손하게 한다. 모든 순간마다 내 입술에 감사가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한 것이 없다. 내 인생이 이런 모습이 되기에는 자격이 없고, 철저하게 거리가 멀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금의 나 되게 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늘 나에게 선을 베푸셨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나를 참아 주셨다. 그러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예정 교리와 씨름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전해야 한다.더 필요한 것은 없다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처음 예정론을 접했을 때,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 놓고 불의를 피력했다. “하나님의 예정은 불공평합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실 수 있습니까?”이런 주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듣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다. 하지만 참되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불평하는 나를 부드럽게 감싸 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나의 눈을 열어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예정 교리의 아름다움과 삶에 안정감을 주는 그 교리의 힘을 보게 하셨다.만일 하나님이 내가 따지고 들었던 바로 그 의(justice)를 따라 행하셨다면, 나는 그 의에 근거하여 지금 이 순간 지은 죄에 합당한 진노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비롯하여,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은 바로 ‘자비’이다.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redestination Is Biblical, Beautiful, and Practical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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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될 수 없는 네 가지
by Caleb Flores
2018-11-19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다. 보통은 “죄로부터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와 같은 대답을 한다. 나는 종종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그래서요?”라고 묻고 싶다. 하지만 이렇듯 귀찮게 하는 질문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입으로만 믿는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와 결과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 받는다면, 좋은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 교리들이 교회에 흘러 들어온다. 그리스도가 왜 죽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엇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들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성경은 왜곡되고 있다.여기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될 수 없는 네 가지 것들이 있다. 1. 예수님은 당신의 성공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예수님은 당신의 건강, 부귀, 안전, 평안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 혹 당신이 현재 그런 상태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태가 당신이 누려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영적인 징벌이 아닌 일시적인 평안을 주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영적인 번성이 아닌 일시적인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물리적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는 치명적이며 해로운 가르침을 주장한다. 이런 가르침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종종 빈곤한 환경에서 극심한 박해를 당하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심한 범죄에 해당한다.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의 의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졌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신다(엡 2:7). 이것이 바로 당신의 삶에 약속된 유일한 부요함이다. 이것은 독생자의 무한한 비용으로 당신을 구원하신,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알 때 찾아오는 기쁨과 평강이다.2. 예수님은 당신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자유? 보수? 환경운동가? 동성애혐오자? 예수님의 이름은 이런 온갖 ‘사상’(ism)을 위해 사용되어 왔다. 우리 자신의 전통, 세계관, 또는 명분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여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예수님은 보수적인 공화당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진보적인 민주당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취임식이지, 우리 자신의 작은 왕국을 합법화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이용해도 좋다는 초대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사회적, 정치적 명분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원을 주지는 못한다. 죄악된 마음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다. 결국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어떤 삶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크리스천들에게는 최고의 메시지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복음이다.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이 복음을 설교하고 그 외의 다른 모든 문제들은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3. 예수님은 당신이 변화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변명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예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칭의도 없다. 또한 우리의 적대적인 영혼을 고치시고 예배의 작은 행동들을 가치 있게 만드시는 성령의 오심도 없다. 예수님 없는 우리는 올무에 걸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된 욕망의 노예들이고,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죄 가운데 남겨 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오직 은혜를 베풀고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변화된다.그렇다면, 여전히 죄를 범할 것인가? 그렇다. 어리석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를 짓는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신자는 인내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자신과 다른 지체들을 더 사랑하도록 성장시키고,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죽여 가실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느리고 꾸준한 행진일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재조정이다.은혜는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의 죄에 대항하여 예수님 편에 서도록 가르친다. 이 은혜는 당신을 회개하게 한다.4. 예수님은 단지 당신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교회 주변을 둘러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보다 도덕을 찾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보다 율법을 원하는가?당신은 은혜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이것은 소비자 상품이 아니다. 상품화할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자율성의 부족,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들이 완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그러나 은혜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종교적인 바리새인의 마음은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에 우리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도덕적인 수준에 우리는 평안을 느낀다. 그런 다음, 그만큼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한다. 우리의 교만과 자기 의는 창녀와 포주의 죄 만큼이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목사의 죄는 알코올 중독자 만큼이나 불쾌하게 만든다. 그들은 둘 다 십자가 밑에서 발견되는 구원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영원토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부요를 상속받게 하셨다.예수님은 이 시대에 우리의 작은 사회적, 정치적 왕국을 세우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세대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예수님은 우리가 계속 죄를 범하도록 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멈출 수 있는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선행으로 영적인 이력서를 쓰게 하려고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겸손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Things Jesus Didn’t Die For번역: 고갑균
복음
십자가
죽음
구원
축복
은혜
순종
사랑
예수님
은혜란 무엇인가?
by R. C. Sproul
2018-11-16
우리는 수십 년 전 리고니어 밸리스터디센터에서 추수감사절 카드를 보냈다. 거기엔 크리스천에게 전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신학의 본질은 은혜이고, 성화의 본질은 감사이다.”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과정에 있어 사람과 하나님의 역할이 각각 무엇인가 논쟁할 때, 우리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우신지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승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사의 이유도 바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릴 때 배운 요리문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조건적 호의다.”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은혜는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은혜를 공로와 관련지어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닌 줄 앎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은혜는 공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잘 보여 준다. 그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처음으로 ‘완전함’과 ‘공평함’과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에 걸쳐 설명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모든 입술이 그 말을 그치게 될 것이다. 정죄는 오직 죄인들을 향한 선언이기에 하나님의 심판대는 모든 타락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 칭의는 의무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써 주어진 것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다. 만일 그의 구원과 칭의의 기초가 칭찬받을 만한 예배나 순종에 있었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자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어떠한 공로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믿음 뿐이었고, 그 믿음 자체도 선물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엡 2:8-10).로마서 4장 4-8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는 핵심 본문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는 은혜다. 일하는 자에게 은혜는 오히려 빚이다. 만일 은혜의 기초를 공로로 삼는다면, 이는 은혜 이전에 갚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일하면 100달러를 주겠노라고 가정하면, 나는 당신이 여덟 시간을 일한 것에 대해 보상해야만 한다. 나는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의무를 이행한 것에 대한 몫을 받을 뿐이다. 당신이 계약을 지키면, 나는 그에 합당한 삯을 주어야 할 의무을 갖게 된다. 주님께 우리는 보상할 길이 없는 빚진 자다. 성경은 경제 용어를 이용해서 구속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고전 6:20). 하지만 우리는 그 값을 도저히 갚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빚을 갚으실 수 있다. 이것이 은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구원을 보증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다. 우리는 어떤 자격도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은혜로 그의 공로를 우리에게 베푸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뿐이다. 즉, 은혜의 본질은 자발적인 베푸심이다. 조건이 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의인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이고 온전한 기준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매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홀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로를 가지고 계시며, 예수님은 그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다. 우리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어떤 것도 없다. 그것은 순전한 은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길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교사들이 알려 주는 참된 성화의 출발점은 우리의 죄인된 본성을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며, 사랑과 순종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도 더해 갈 것이다. 은혜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의 연약함을 덮으셨음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이다. 윤리적인 삶을 향한 크리스천의 동기는 단순히 율법이나 규칙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인 삶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감사에 기초해야 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 점을 지적하셨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너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계명을 지키라.” 은혜,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참된 이해는 항상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Is Grace?번역: 강화구 (매일배움)
신학
교리
은혜
바울
로마서
믿음
아브라함
성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
by John Piper
2018-11-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위의 두 본문을 통하여 나는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만, "혹 회개함을 주사"라고 기록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원하는 바를 모두 행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바람 중 일부는 다른 조건들로 인해 실행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지혜는 그분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만 발휘된다. 하나님이 모든 죄인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일부 죄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둘째, 진리를 알게 하심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문은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선물이 없다면,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도 이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에 닿을 기회를 얻게 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도록 이끈다.셋째, 여기서 본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진리’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인도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진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진리를 아는 것(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이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자연인이 볼 수 없는 진리란 무엇일까? 자연인은 복음 안에 있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넷째,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보는 눈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한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이 멀어 있다. 사탄은 우리를 계속 눈이 먼 상태에 머물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복음의 진리를 보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주시면’ 우리의 눈이 열린다. 다섯째, 우리는 비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전도해야 한다. 이때 우리의 기도 혹은 전도는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희망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영적인 죽음과 사탄의 꾀를 극복할 능력을 가지셨다. 우리는 이 진리 위에 기도와 말씀의 증거를 붙들어 매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기를 신뢰하며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의 가르침을 새기도록 하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Desires All to Be Saved and Grants Repentance to Some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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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에 관한 열 가지 사실
by Kevin DeYoung
2018-11-13
1. 모세는 실제로 ‘십계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출애굽기 20장 1-2절은 가장 유명한 성경 말씀 중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전 세계가 가장 중요한 종교 문헌이라고 여기는 십계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실제로 ‘십계명’이라고 불리지 않았다.구약성경(출 34:28; 신 4:13; 10:4)에서 세 번 등장하는 ‘십계명’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 의미로 ‘열 가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20장이 자주 십계명(decalogue)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즉, 데카(deka)는 헬라어로 ‘10’을 의미하고 로고스(logos)는 ‘말씀’을 의미한다. 이를 해석하면,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 가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십계명이 과거를 넘어 현재에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말씀임을 강조하고 싶다.2. 십계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 준다율법은 제정자의 마음과 특성을 표현한다. “율법에는 관심 없어”라고 말하기 전에, 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발끈하기 전에, 우리는 율법을 만드신 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그 계명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영광, 가치, 왕권에 관해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우리에게 말해 준다. 율법의 제정자를 무례하게 여긴다면 그 율법을 존중할 수 없다.3. 십계명은 세상과 우리를 구별한다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다(벧전 2:9).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었으며,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법규를 따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항상 거룩한 사람들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셨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즉,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다.4. 십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제공한다우리는 종종 십계명이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노예처럼 가두고, 우리의 꿈과 잠재성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삶(요 10:10)과 진정한 자유(요 8:32)를 주시기 원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요한일서 5장 3절은 그분의 법이 무겁지 않음을 분명히 말한다.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도록 묶거나 규율들로 짓밟으려고 하지 않으신다. 십계명은 감옥 창살이 아니고, 길을 터주는 교통법규와 같다. 교통법규가 없으면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운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호등의 변화에 따라 길을 건넌다. 학교 근처에서 운전할 때 속도를 줄이며, 학교 버스가 지나가면 일단 멈춘다. 교통법규가 없다면, 식료품점에 차를 몰고 갈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가파른 산길을 운전할 때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가드레일을 저주하는가? 아니다. 가드레일을 산 위에 가져다 두기 위해 큰 비용을 들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안전장치가 자유롭고 보호받는 여행을 하도록 돕기 때문이다.십계명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한 지시사항이 아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은 백성이 이 세상에서도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법률이다.5. 십계명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기독교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야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율법이 생긴 이유는 구원을 위함이 아니다. 당시 애굽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가 너희의 외침을 듣고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므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그렇게 너희가 구원을 얻어 자유와 용서를 받게 되면, 나는 너희가 살아갈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구원은 순종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은 순종할 이유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계명을 순종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켜 행하는 하나님의 모든 법은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실천 가능하다.6. 십계명은 우리의 직관이나 문화적 코드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다이 시대의 정신은 주관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법은 지키지 않으며, 남을 정죄하는 행위에 거침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에 관하여 상당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성과 관련된 도덕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더 이상 성에 개방적인 모습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적 자유를 외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인 비방과 모욕적인 말들로 쉽게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다툼을 일으킨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신들만의 도덕적 코드를 지니고 있다.그러나 성경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잠 9:10). 우리는 마음속의 외침을 따를 때 도덕적 가르침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덕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알기 원하고, 선한 삶을 살기 원하며, 친구나 이웃과 함께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을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한다. 7.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은 십계명에 근거해 있다교회는 역사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의 중심에 십계명을 두었다. 특히 어린이와 새신자들을 위한 교육에 십계명을 활용했다. 여러 세기 동안 교리 교육은 세 가지를 기본으로 삼았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신자들이 기독교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 대답에는 늘 십계명에 대한 강조가 포함되어야 한다.8. 십계명은 구약의 나머지 율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성경이 십계명을 유별나게 강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십계명이 가진 특별한 위치를 저평가해서는 결코 안 된다. 먼저 십계명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대면하여 주신 말씀으로서(신 5:1-5),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계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신 5:22-27). 출애굽기 20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문학적으로나 영적으로 높은 자취를 남겼다. 이 율법이 쓰인 돌판이 만나 및 아론의 지팡이와 함께 언약궤 안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이치다(히 9:4).구약성경에는 많은 법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십계명이 나머지 법들의 근본이 된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헌법과 같으며, 구약성경의 다른 법들은 그 뒤를 잇는 일반 규율이다.9. 십계명은 신약 윤리의 핵심이다예를 들어, 마가복음 10장 17절을 생각해 보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계명들을 네가 알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신 후, 우리의 이웃과 관련 있는 계명들을 나열하신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19절).우리는 나머지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 젊은이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도록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명백하게 지키지 못했던 한 가지 명령이 바로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넘어간 명령, 즉 탐내지 말라였기 때문이다(20-22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웃에 대한 의무를 가르치실 때, 바로 십계명을 거론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10. 십계명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적절하다우리가 그 계명들을 충분히 혹은 완벽히 지킬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십자가로 인도하는가? 물론이다. 동시에 그 계명들은 살아가는 방법,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오늘날에도 시내산에서 전해 내려온 이 열 가지 말씀이 여전히 필요하다. 이 십계명은 구약 시대에도, 그리고 신약 시대와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에게 십계명은 의무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분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 14:15).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Ten Commandment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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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리더십의 모형으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을 사용하지 ...
by Timothy Paul Jones
2018-11-12
한 권의 책을 저술하고 편집하는 일은 꽤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심지어 이미 저술한 책을 완전히 새롭게 편집할 경우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사실 작년에 내가 바로 그 일을 했다.번거롭기 그지없는 작업을 시도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개혁 교회 리더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는 패턴인–리더십의 모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3중직 (Munus Triplex)대략 십 년 전 즈음의 일이다. 당시 교회를 개척하려던 사람들을 통해 ‘왕 같은 리더’(kingly leader) 혹은 ‘제사장적인 유형’(priestly type)이라는 식의 표현을 듣게 된 적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두 유형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런 리더십의 모형이 있음을 알게 됐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저는 목양하는 일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제사장보다는 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목사가 된다면 상담과 심방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또 어느 목회자 후보생은 비슷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저는 선지자적인 교사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사역의 전략과 비전을 다루면서 제 리더십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왕 같은 리더를 찾고 있습니다.”저는 이들과 깊이 교제할수록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델로 삼은 리더십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고 확고히 믿고 있었다. 즉 예수님과 같은 리더가 되는 일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구약성경의 직분들 가운데 한 가지 이상을 모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3중직은 그들에게 자신만을 위한 리더십의 모형을 제공해 주었다. 이 모형을 주창하는 사람에 의하면, 선지자적 리더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불타는 열망을 가진 대언자’이다. 반면, 왕적 리더는 ‘어떻게 비전을 수립하고 조직하며 실행하는지를 아는 지도자’이다. 더 나아가 제사장적 리더는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고 대인 관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역자’라고 할 수 있다.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이러한 리더십 모형은 개혁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 개척자들 사이에서 점점 더 대중화되었다. 내가 아는 교회 개척자들은 존 프레임(John Frame)과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의 삼중관점적 접근(the triperspectival approach)이 교회 개척 컨퍼런스에서 듣게 된 리더십 모형 이론을 강화한다고 주장했다.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도 처음에는 그 모형이 적용되는 방법들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했다. 특히 이 모형으로 인해 나는–‘제사장적 역할’이라고 간주되는–돌봄의 사역을 타인의 손에 맡길 수 있었다. 또한 일부 목회자 후보생들은 상담이나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돌보는 일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당신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The God Who Goes before You)이라는 리더십 서적을 공동 저술하기 시작할 때 세운 목표가 있었다. 이는 교회 리더들이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고정된 카테고리에 집착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리고 책의 저술을 끝마칠 때 도달한 결론은 이러했다. 바로 새 언약 시대의 리더들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적용해 온 모형 이론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두에 거론한, 책을 거의 처음부터 다시 쓰게 된 이유이다.3중직을 사용할 때 수반되는 문제들물론 3중직은 그 자체만으로 성경적인 배경을 띠고 고대사회로까지 소급되는 기원을 가진 훌륭한 구조이다. 그러나 선지자, 제사장, 왕이 다른 지위에 있는 서로 다른 리더들의 역할을 묘사한다는 개념은 비성경적인 현대 사상이다.이제 내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이끌어 준 수많은 성경의 진리들 가운데 세 가지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1. 구약성경에서 왕직은 조직적 리더십이 아니라 언약적 신실함과 관련되어 있다이스라엘 왕의 주요 임무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따르는 일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특별히 모세가 향후 등장하게 될 이스라엘 왕들에게 전한 명령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율법책을 기록하라”(신 17:18).이 명령은 각 왕들로 하여금 백성을 판단할 때에 정의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했다. 또한 적이 백성의 안전을 위협할 경우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과의 언약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비전을 조직화하는 전략들은 이스라엘 왕의 필수 자격 요건에 해당되지 않았다.즉 왕의 리더십과 조직화를 위한 전략을 동일시하는 것은 리더십에 관한 현대 서구사회의 개념을 구약성경의 언약적 왕직을 이해하는 일에 삽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2. 새 언약에서 왕직과 제사장직은 개별적인 역할들이 아니라 공동의 직분이다 하나님은 새 언약의 백성들을 완전한 대제사장이자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임명하셨다(벧전 2:9; 딤후 2:12; 계 5:9-10).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모든 민족과 나라의 형제자매들이 단일한 제사장 직분을 얻게 되었다.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왕같이 되거나, 더 제사장처럼 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진 왕적 제사장 직분(Christ’s royal priesthood)의 모든 측면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공동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여러 구별된 은사들을 서로 다른 교회의 리더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유의할 점이 있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이 어느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뚜렷하게 지니고 있는 개별적인 역할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이해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모든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이유로, 고린도 교회의 몇몇 교인들이 각각 ‘왕 노릇’을 하고자 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자리로 돌아가 자신과 같이 종으로 섬기는 삶을 본받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고전 4:1, 8, 16절).3. 가르치는 일은 선지자보다도 제사장과 훨씬 더 뚜렷하게 연관된 사역이다이 모형에 따르면, 유능한 교사는 선지자적 리더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는 일을 반드시 예언과 연관시키지는 않는다. 사실 가르치는 일은 선지자보다도 제사장과 관련된 사역으로 빈번하게 나타난다(레 10:10-11; 왕하 12:2; 대하 15:3; 17:7-9; 35:3; 스 7:6-10; 느 8:7-9; 사 28:7-10; 렘 18:18; 겔 7:26; 22:26; 미 3:11; 말 2:7-9).선지자들은 기록된 계시를 해석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일은 앞서 주어진 다른 계시들이나 또는 그들의 선포에 뒤따르는 사건들에 비추어 검증되었다(민 12:6-8; 신 18:19-22).심지어 3중직이 서로 다른 리더십의 유형들을 묘사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다 치더라도, 예언이 가르치는 일에 직접 연관된 사역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더욱이 신약성경에서 예언은 1세기의 모든 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은사로 묘사된다(행 2:17; 고전 14:1-5, 31-39).결국 선지자, 제사장, 왕이 다양한 직분에 있는 서로 다른 리더들이 가진 역할이라는 개념은 최근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내가 발견한 최초의 언급은 1967년에 출판된 R. B. 카이퍼(Kuiper)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The Glorious Body of Christ)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목회 리더십에 관한 책을 쓰며 성경을 연구한 결과, 이 모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수개월을 들여 완성했던 책을 다시 저술하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3중직은 분명히 우리의 리더십을 구체화한다. 하지만 그 직분들은 일종의 리더십 모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어 그와 연합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기능으로써 다루어질 때 우리의 리더십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n’t Use Prophet, Priest, and King as a Modern Leadership Typology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리더십
선지자
제사장
왕
신실함
카이퍼
예수님보다 큰 사역을 담당하는 제자들
by Don Carson
2018-11-0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분이 행하신 사역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큰’(greater)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목을 끄는 놀랄만한 일들을 행하게 된다는 것일까? 사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욱 이목을 끌 만한 기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분명 ‘더 큰’이라는 수식은 그런 내용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더 큰’이라는 표현이 ‘더욱 많은’ 또는 ‘더욱 넓은’ 사역을 묘사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라면, 실제로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전 세계에 말씀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일을 목격했다.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돕고, 교육했으며, 그들에게 식량을 전달했다. 이러한 발자취로 미루어 보았을 때, ‘더 큰’ 일들이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회심한 자들이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본문에서 예수님은 더 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설명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거쳐 승천하시는 일은 바로 제자들이 수행하게 될 사명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즉, 그분이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교회는 사명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을 증언하게 하실 약속된 성령 강림에도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요7:39; 15:26; 16:7-11).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더 큰’ 일들을 수행하게 된다.이런 설명 자체는 옳다. 그런데 그 의도라면, 왜 예수님은 ‘더 많은’(more)이 아닌, ‘더 큰’(greater)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특권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살펴보며 도움을 받아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다른 이들을 비교하며 강조하신 점은 그가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자이지만 아직 천국에 참여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소명을 받은 시점은 구속 역사(the history of redemption)에서 그보다 이른 시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에 참여하는 특권을 가진 자라면 그가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는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 ‘큰’이라는 개념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수식의 의미다. 곧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the already inaugurated eschatological age)에 들어가는 특권을 부여받은 상태를 가리킨다.이와 유사한 말씀을 요한복음 1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예수님은 구속 사역의 일환인 ‘아버지께로 가는' 사건을 통해 구속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밝아오는 종말의 시대를 위한 특수 사역을 수행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사역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일들이 아니었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 사역들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지만 이내 승천하셨으며 오순절 사건 후에는 (육신으로 함께하며) 그 사역을 수행하지 않으셨다.이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이 이루신 사역의 결과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차원에서 제자들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보다 더 크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필연적으로 미완성 상태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완성된 이후에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에서 수행되었다. 즉 그들의 사역은 바로 그 성취의 시점(the moment of fulfillment) 이후에 수행되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쟁취하신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지다이와 같이 위대한 광경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고독한 지경에 몰아넣지 않는다. 아무런 열매도 확신할 수 없고 약속된 복이라고는 오직 미래를 위해서만 주어지는 자리에 우리를 두지 않는다.오히려 이와는 대조적이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이미 승리가 쟁취된 싸움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not yet consummated), 이미 시작된(already dawned) 종말의 복을 알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분이 부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사역을 완성하실 구주와 함께 새로운 무리를 불러내는 일에 미약한 노력을 더할 뿐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가진 소명의 진정한 측면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사역들도 이러한 광범위한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결국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아버지께로 감”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사역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 사역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이루어졌다. 두 번씩이나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며 고통을 겪으셨다(요12:27; 13:21).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원제: How We Do Greater Things Than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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